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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칼럼] 아르헨티나의 고민, 복지는 공짜가 아니다

한때 세계 부국10위 아르헨<br>GNP 절반으로 뚝 떨어져<br>보편적 복지 실현하려면<br>정략 아닌 정책으로 풀어야


우리와 반대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다. 아르헨티나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반영하듯 사람들은 어두워 보였다. 광활한 땅에 목축이 발달하다 보니 먹을 것은 풍족했다. 그러나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에 세금을 매기는 까닭에 생필품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해 사람들은 오로지 달러에 의존할 뿐이었다.

지난 7월26일은 에바 페론의 60주기였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가 간간히 들렸다. 도시 곳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제2의 에바'가 되고 싶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의 초상을 그려 넣은 100페소라는 최고액권을 발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역사에 처음으로 여성의 얼굴을 지폐에 넣은 것이다.

에바 페론은 후안 페론의 둘째 부인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살아서는 신데렐라, 죽어서는 악녀(惡女)와 성녀(聖女)라는 다른 평가를 받는 '불멸의 퍼스트 레이디'다. 대초원의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비참한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5세에 가출해 남미의 파리로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영화배우의 꿈을 불태우면서 후안 페론을 만났다. 권력의 배후에 남성을 장악한 여성으로 클레오파트라, 달기, 마리 앙투아네트, 장녹수, 강청 등을 들 수 있지만 그 누구도 빼어난 미모와 연설로 권력을 주무른 에바 페론을 대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만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 부국 10위권에 들었다. 한때 프랑스를 훨씬 앞섰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국내총생산(GNP)은 오늘날 그것의 절반도 채 되지 못한다. 선진국 대열에서 아르헨티나가 낙오한 배경에 페론이 권좌에 등장한 이후 노조의 정치화와 군부의 쿠데타가 교차하는 가운데 나타난 정치 균열이 자리 잡고 있다.

페론주의는 후안과 에바 사이의 합작품이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국가사회주의에 착안해 일종의 대중 동원의 이념이자 방법으로 페론주의는 출발했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우익 민족주의로서 페론주의는 프티 부르주아를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유럽의 파시즘과도 다르고 노동자 계급의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포퓰리즘과도 다르다. 특히 후안과 에바의 개인 우상화 작업이 이뤄졌다는 특징도 있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로 하여금 자본가 계급이 바라던 안정된 자본주의 구축을 가로막았고 노동자 계급이 지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잠재력도 거세해버렸다. 페론주의를 제거하기 위한 군부의 정치 개입은 노동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가져왔고 그것은 다시금 페론을 박해받는 노동자의 구세주로 부활시켜줌으로써 민주화의 질곡으로 작용하는 역설을 가져왔다.

에바 페론은 자신의 재단을 만들어 가능한 많은 병원ㆍ학교ㆍ양로원을 지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페론주의의 신도로 만들었다. 부자들은 재산을 뺏어간 에바 페론을 증오했지만 빈자들은 복지를 가져다준 에바 페론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특히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의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도입, 여성의 참정권 부여 등 여성을 위한 입법활동으로 인해 여성으로부터 에바 페론에 대한 지원은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귀로에 이성형 박사의 부음에 접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인 그는 폐쇄적 학력주의가 만들어놓은 차별의 희생자였다. 중남미 신자유주의 20년 공과를 통해 우리의 방향을 잡으려 고민했던 그다.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의 보편적 복지처럼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좋은 복지는 모든 국민이 개세(皆稅)주의 원칙 아래 누진적으로 세금을 분담하는 원칙을 지녀야 한다. 복지는 정책으로 풀어야지 정략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그의 고언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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