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가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건물을 짓는 것이 건축의 전부가 아닙니다. 건축산업이 국격을 높이고 창조경제의 한 축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일감이 적은 국내보다는 건축사들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제도개선과 지원이 요구됩니다."
건축설계업계의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건설 경기 침체다. 집값 하락에 따른 부동산 시장 위축은 당연히 발주물량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 같은 일감 부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는 건축사도 구조적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일감은 줄어드는데 종사자는 오히려 늘고 있는 기형적 구조인 셈이다.
이달 초 서른 번째 대한건축사협회장으로 당선된 김영수(58·사진) 회장은 건축설계업이야말로 고부가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산업으로 새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건축업에 대한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을 만나 건축설계업계의 현안과 임기 2년간의 협회 운영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김 회장은 "선진국에서는 건축을 문화적 측면에서 판단하고 예술성을 강조한다"며 "우리도 건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차원 더 높은 문화적 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축을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다양한 제언을 했다. 우선 그는 "국내 대학과 현장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산학협력ㆍ건축사인턴제 등을 확대해 현장과 공존할 수 있는 대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동시에 대학 건축학과의 정원 조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한 해에 건축학과 졸업생들은 3,000명씩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이 중 1,000명 정도만이 건축설계사무소에 취업하고 있다. 어렵게 건축사가 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되니 우수한 인재가 유입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 회장은 "현재 정원은 건설 경기가 호황일 때 정해놓은 것"이라며 "교육당국에서 인원 수를 유연하게 조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건축설계업계에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 설계회사는 한 해에 1,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지만 소규모 업체는 매달 직원들 급여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를 개선해야 건축산업도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양극화 현상은 필연적이지만 우리나라는 정도가 심하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건축사 한 명이 설계할 수 있는 총량을 정해놓는 식의 총량제나 업체 규모에 따라 일정 금액 이하 프로젝트에는 참여할 수 없게 자격을 제한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죠."
물론 업계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실력을 인정받은 '스타' 건축사를 키워내야 하고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대규모 건축물에 대한 설계능력도 제고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층빌딩 설계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떨어져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대형 사무소일수록 해외 업체와 경쟁할 수 있도록 투자가 필요합니다."
김 회장은 건축설계업 발전을 위해 지난 정부 때 만들어진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법안 몇 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건축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화시키고 국민들에게 건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며 "건축문화를 활성화해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고 국가 이미지 개선에 이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축설계업계의 업역도 확장해야 합니다. 설계만 가지고 먹고사는 시간은 지났습니다. 건축사들도 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건축물의 유지관리, 건축공사 사업관리, 도시계획 등에도 진출해야 합니다."
김 회장은 건축설계업계 현안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먼저 협회장 선거 당시 공약으로 내걸었던 설계 및 감리비 정상화에 대해서는 협회 차원의 실천운동을 벌일 방침이다.
"덤핑 수주는 업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설계비 제값 받기 운동과 함께 설계 제대로 하기 운동 등을 협회 차원에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설계의 품질이 향상되면 설계에 들이는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설계비도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와 함께 소규모 건축물의 설계와 감리를 분리하는 제도도 조속히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건축사들의 이익을 더 챙기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법행위가 판을 치는 소규모 건축사업을 더욱 투명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주장이다.
"설계자가 감리까지 맡게 되면 건축주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자기가 설계를 하고 감리까지 하는 이상 불법행위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겠습니까."
현재 시행되고 있는 '건축물유지관리점검제도'는 한층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건축물유지관리점검제도는 사용 승인 후 10년이 지난 건축물의 소유자나 관리자가 2년마다 건축물 유지관리점검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허가권자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는 이 제도를 '주치의'제도에 비유했다.
김 회장은 "각 건물에 대한 이력 카드를 준비해서 그 건물이 소멸될 때까지 안전사항 등을 점검하도록 하는 제도"라며 "분명 장점이 있고 발전시켜야 하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현재 협회에서는 업무 매뉴얼을 만들고 있으며 조만간 이를 적용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유지관리와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민감한 사안이지만 현재 세 곳으로 분리돼 있는 대한건축사협회ㆍ새건축사협의회ㆍ한국건축가협회의 통합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다. 명확한 기준 없이는 섣불리 통합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김 회장은 "건축사 자격증(라이선스)을 가진 건축사들이 합쳐야 한다는 것이 기본원칙이 돼야 한다"며 "회원 자격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당장 통합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올해로 22회째를 맞은 건축문화대상은 좀 더 저변을 넓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22년째 이어오고 있는 건축문화대상도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늘려야 할 때입니다. 국민과 가까운 건축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건축사들과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잔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건축물은 개인의 재산이며 사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인식도 건축문화대상을 통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회가 건축물 탐방 등 국민들에게 건축을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건축사들만의 일이었고 국민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며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건축문화대상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세계 건축계의 올림픽'인 국제건축사연맹(UIA) 서울 총회 준비도 착실하게 준비해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4년 남짓 남아 시간은 충분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달 중 조직위원장을 선출하고 조직위원회와 사무국도 조만간 꾸릴 계획이다. 조직위원회가 구성되면 대회 준비는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추정예산이 약 170억원 정도인데 범건축계가 함께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예산을 모금하겠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대회이며 국격을 높이는 기회인 만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장관리·경영 뛰어난 마당발… "인간이 편안해야 최고 건축" 박성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