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12월이라서가 아닙니다. 바로 인사이동이 있는 시즌이기 때문입니다. 삼성그룹은 지난 1일 사장 승진자 3명을 포함해 11명 규모의 인사를 단행한 데 이어 4일 353명을 임원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는 2008년 이후 최소 규모로 지난해보다 123명 줄어든 수치입니다. 올 한해 실적이 부진했던 삼성전자의 승진자 규모가 27.3% 감소한 탓입니다. 일반적으로 임원 임명 제도는 실무진 대상 운영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계열사 대표들을 평균 그룹사 내 재무성과, 업계 재무성과, 그리고 목표 성과 대비 달성률 등으로 촘촘하게 평가한 다음 그들의 연봉과 임명할 수 있는 부하 임원의 수가 정해집니다. 따라서 임원직은 본인의 노력과 역량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회사의 실적, 그리고 대표의 논공행상 개념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영업이익이 4조605억여원으로 전년동기 10조1,635억여원 보다 60% 감소했습니다. 이런 특성에 비추어 보면 임원 승진자 수가 대폭 줄어든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임원 인사를 통해 조직이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해 처음 실시한 이번 삼성그룹의 인사는 임원 세대교체에 속도를 냈다는 분석입니다. 앞서 사장단 승진자도 모두 1960년 이후 출생자로 채웠고, 사장단을 제외한 신임 임원 평균연령도 46.7세로 작년 47세보다 젊어졌습니다. 삼성 관계자는 “이번 임원인사는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라며 “젊고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과주의는 현대 기업 경영이 정착된 이래 가장 큰 변수 중 하나입니다. 회사는 개인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개발하고 운영하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개인은 자신이 좋은 평가 결과를 낼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합니다. 그래서 ‘재무통’이니 ‘기획통’이니 하는 말이 생겨납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문성을 갖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강한 인재가 되는 것이죠. 과거에는 대규모 인사가 단행된 이후 몇몇 임원의 스토리가 지면을 가득 채우곤 했습니다. 외환위기 시절 구조조정본부라는 거대한 집단을 조직한 재무통 임원이나 중장기 전략을 이끌고 나갈 소조직을 만든 전략통 임원 등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화제가 됐죠.
그러나 성과주의와 전문주의에 입각한 임원의 커리어(career) 설정은 때때로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제임스 마치 스탠퍼드대 교수는 ‘역량의 덫’(Competency‘s trap)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는데요. 고도의 전문화와 성과 중심 경영에 의해 특정 분야의 지식, 능력을 가진 사람이 넘쳐나는 조직은 정작 변화를 요구하는 위기나 과도기적 상황에 위험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렌즈, 즉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의 시각을 바탕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환경 변화가 생기더라도 그 상황에 걸맞는 지식이나 역량을 취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계속 자기 시야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연성이 떨어지게 되고, 결국 위기에 취약한 조직이나 개인이 되는 셈입니다. 제임스 마치 교수는 이런 성향이 관성, 즉 과거의 습관을 쉽게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역량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량을 차등 순위로 두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큰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고 변화를 두려워함으로써 되려 위험에 빠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디테일에 강한 임원들은 역량의 덫에 걸리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랫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지표, 숫자를 소수점단위까지 외워서 금세 기억해 보라고 주문하는 모습을 전해 들을때면 자신의 정당성과 위엄을 세우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최고경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부적인 부분까지 엄하게 단속하면 아랫사람들이 장악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 부임하자마자 조직을 개편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과감하게 전면에서 배제하는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이라는 언론의 평가를 받기도 하죠. 자칫 잘못하면 조직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행동인데도 말인데요.
임원은 의사결정자입니다. 과거 부장, 차장이었을 때와는 다른 정체성과 행동 양식을 요구 받습니다. 좋은 성과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서 거시적인 환경 변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경영자 연구로 잘 알려진 시드니 핑켈스타인 박사는 경영자와 임원은 역사적, 제도적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있던 자리에서 충분히 그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승진’. 과거의 ‘승진 성공공식’을 되풀이하는 순간 성공의 덫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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