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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금리 0.5%P 올리면 분기 1000억弗 유출 점쳐
통화가치 떨어지면서 자산 투매로 이어질 수도
中 성장 둔화·원자재 가격 급락 등 곳곳 지뢰밭
미국의 출구전략이 가시화하면서 이른바 '여행자 달러'가 신흥시장에서 탈출할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행객처럼 여러 신흥국을 떠돌아다니며 리스크가 큰 투자에 열을 올리던 달러화 캐리트레이드 자금의 청산이 본격화할 경우 '저성장-고부채'라는 최악의 조합에 시달리는 일부 신흥국이 금융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캐리트레이드는 미국 등 저금리 국가에서 돈을 빌려 고위험·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기법이다. 신흥국에 유입된 캐리트레이드 자금은 무려 5조달러로 추산된다.
◇달러화 캐리트레이드 유출 신호=현재 본격적인 캐리트레이드 청산 움직임은 없지만 '슈퍼달러' 귀환에 일부 적신호도 켜진 상태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지난 10월 한 달 동안 신흥국 주식시장에서 순유출된 자금은 100억달러에 이른다. 지난해 여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시사로 일부 신흥국이 금융위기 직전으로 몰리며 '긴축 발작'을 일으킨 지 1년여 만에 최대 규모다. '월가의 공포지수'라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변동성지수(VIX)도 지난달 15일 26.25까지 치솟으며 2012년 6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질 경우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면서 청산 압력도 높아진다.
찰스 콜린스 II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연준 통화정책 변경 움직임에 리스크 회피 심리가 커지면서 신흥시장 자금 유입액이 줄었다"며 "연준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면 해당 분기에만 신흥국에서 1,000억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미칼라 마르쿠센 이코노미스트도 "강 달러에 따른 (신흥시장) 발작은 지난해 긴축 발작보다 더 우려되는 시나리오"라고 경고했다.
일단 달러강세에 환차손을 견디지 못한 투자가들이 캐리트레이드 자금 청산을 시작하면 쏠림현상이 가속화하면서 경상수지 등 펀더멘털이 취약한 일부 신흥국은 '자산가치 급락→통화가치 하락→자산투매'의 악순환에 빠지면서 금융위기로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주요 신흥국 가운데 브라질·러시아·인도·아르헨티나·터키·인도네시아·칠레 등 해외 자본 의존도가 높은 이른바 '브리아틱스(Briatics)'와 중국을 캐리트레이드 자금 유출에 가장 취약한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전 핌코 최고경영자(CEO)는 "여행자 달러는 (신흥국 등에 대해) 위험을 각오하고 투자하는 게 아니라 위험을 만들어낸다"며 "투자환경이 좋으면 들어갔다가 금융 시스템을 왜곡시킨 뒤 거시경제가 각종 어려움에 빠지면 탈출한다"고 설명했다.
◇4대 역풍 직면한 신흥국=역사적으로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 신흥국 금융시장은 대형 충격을 받았다. 1994년 2월~1995년 2월 연준이 금리를 인상했을 때 신흥국 주식과 채권 가격은 첫 한 달 동안만 각각 2.2%, 10.1% 하락했다. 특히 아시아·중남미 등 일부 국가들은 외환위기까지 겪었다.
물론 경상수지, 외환보유액, 시장친화적 환율제도 등 신흥국의 사정이 1990년대나 테이퍼링 발작을 겪었던 지난해 중순과는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또 유럽과 일본은 양적완화 조치를 오히려 확대했고 연준이 점진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도 신흥국에는 위안거리다.
하지만 과거 금융위기 때보다 더 큰 뇌관도 널려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선진국 중앙은행의 천문학적인 돈 풀기에 신흥국이 빚더미에 올라 있다는 게 우려 요인이다. 외국인 직접투자(FDI), 주식, 채권, 인수합병(M&A) 등을 모두 포함할 경우 2005년 이후 신흥국에 들어간 자금은 7조달러에 이른다는 게 IIF의 분석이다.
더구나 저성장에 시달리면서 신흥국 경제의 기초체력 역시 고갈된 상태다. 바클레이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연준의 양적완화 종료 전후로 신흥시장 자산 가격이 싸졌지만 투자 적기는 아니다"라며 "중국의 성장둔화, 유로존 등의 수요감소에 따른 원자재 가격 급락, 연준의 금리인상 전망에 따른 유동성 감소, 달러강세 및 환율시장 불안 등 신흥국에 4대 역풍이 불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중국에서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유출되면 글로벌 경제에 재앙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올 3·4분기에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1,000억달러 줄어든 데 대해 성장둔화를 우려한 핫머니의 이탈 신호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또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칠 경우 신흥국 간의 펀더멘털 격차는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소속인 엘런드 니어 등 3명의 경제학자는 "변동성이 높아지면 내외 간 금리 격차를 제외하면 성장률, 공공부채 수준 등 다른 요인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며 "투자가들이 무차별적으로 신흥국 자산을 내던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흥시장이 위기에 빠질 경우 기초체력이 튼튼한 신흥국에는 오히려 외국인 자금이 몰리면서 차별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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