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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 외국인 친구가 복통을 호소하길래 갖고 있던 약을 주겠다고 했더니 한국 약은 먹어본 적이 없어 꺼려진다고 거절했다. 그 친구는 혹시 일본 약은 갖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자존심이 상해 반박했지만, 일본은 믿을 수 있는 선진국이고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그 친구의 선입견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다. 십여년도 더 된 일이다.
사실 일본 기업은 오랜 세월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탄탄한 기술력과 높은 수준의 품질, 일본은 뭘 해도 확실하다는 국제적인 신뢰감은 한국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거품 경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대지진을 극복하며 보여준 일본인들의 침착한 모습에 국제사회의 찬사가 쏟아졌다. 오랜 불황으로 경기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일본은 신뢰의 대상으로서의 굳건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잃어버린 20년' 동안 지켜왔던 일본 사회에 대한 믿음이 최근 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진앙지는 과거 일본에 대한 신뢰를 쌓는 토대 역할을 해온 기업들이었다. 일본에 대한 신뢰에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이후다. 일본 굴지의 전력회사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보인 은폐 행위는 온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일본판 엔론' 사태로 불리는 올림푸스의 회계부정이 외국인 최고경영자(CEO)에 의해 수면 위로 부각됐다.
고위 경영진이 연루된 이 사건은 투명한 선진기업의 이미지가 강했던 일본 기업들에 치명타가 됐다. 최근에는 일본의 기업연금 운용사가 수십억달러 규모의 운용자금을 날리는 '일본판 매도프' 사건이 적발됐다. 이 회사의 대규모 손실 요인에 대해서는 투자가 아닌 다른 용도로 자금을 유용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제품 결함과 정보 은닉, 금융비리 등 주식회사 일본은 겉보기와 달리 온갖 치부를 끌어안고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수년째 죽을 쑤고 있다. 엔고와 법인세, 정부의 온갖 규제와 전력난 등 이른바 '6중고'가 기업들을 옥죄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의 진정한 위기를 초래한 것이 외부적 요인에서 비롯된 '6중고'일까. 거듭되는 일본 기업들의 비리와 불투명한 기업 관행을 보면 일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진정한 암초는 내부에서 자라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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