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말 한화그룹은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중심으로 말레이시아에 은행을 세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보험 계열사인 한화생명 입장에서도 수익원 창출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한화그룹은 물론 헝가리에서 '한화헝가리은행'을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 이에 따라 한화생명은 이슬람 문화권인 말레이시아의 금융규제가 국내와 다를 것을 예상하고 철저히 현지화한다는 방침을 잡았다.
하지만 진출은 쉽지 않았다. 말레이시아가 문제가 아니었다. 국내 법이 벽이었다. 한화생명의 실질적인 지배주주가 한화그룹인 만큼 금융산업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금산분리'를 적용 받아 은행을 설립할 수 없다는 얘기다. 금산분리 적용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은행 인수에서도 규제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어 한화 측은 2년이 지나서야 은행 설립 꿈을 접었다.
이뿐 아니다. 동부화재도 지난 2012년 라오스 최대 민간은행인 인도차이나은행의 지분인수를 추진했다. 해외 투자 목적으로 15% 이내에서 지분을 인수할 계획이었다. 보험업법상 15%까지는 금융당국의 승인 없이도 지분 취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금융감독당국이 보험사의 은행업 진출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반대해 동부화재는 결국 주식 취득을 포기했다. 해외에서 판로를 개척하려는 보험사 등 제2금융 업계의 노력은 금산분리와 전업주의의 벽을 넘지 못해 좌절돼왔던 셈이다.
금융위원회가 해외에 진출하려는 보험·증권사 등에 금산분리와 전업주의 적용을 완화하려는 것도 이들 규정이 '보이지 않는 규제'로 작용해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다는 이유에서다. 금융위는 다만 "해외에서 은행을 인수한 뒤 국내에 지점을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제어장치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금산분리 완화 등은 워낙 민감한 이슈라서 해외진출 금융회사에 대한 예외적용이 국내 법의 완화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를 해소하겠다는 의도다.
◇금산분리·전업주의, 국내와 해외 구분해 적용=금융위원회는 국내에 적용되는 금산분리와 전업주의를 해외 진출하는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국내나 해외진출에 동일하게 적용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규제'가 되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금지하는 법이다. 산업자본은 은행의 지분을 4% 이내로만 소유할 수 있다. 한화생명이나 동부화재보험 등 산업자본이 실질적인 지배를 하고 있는 보험회사가 국내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해외은행 인수 역시 같은 잣대가 적용돼 무산돼왔다. 금융위 관계자는 "해외의 은행을 인수하려는 보험사에 금산분리 규정을 예외적으로 적용할 경우 인수합병(M&A)의 1차 벽을 없애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외 진출 금융사에 대한 전업주의도 예외로 둘 방침이다. 전업주의는 은행·보험·증권 등 업종마다 할 수 있는 고유업무를 구분한 것으로 보험사가 은행이나 증권 업무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해외 진출 금융회사에까지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성장에 한계가 많았다. 보험사가 은행업무나 증권업무를 겸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지에도 없는 국내법을 적용 받아 덩치를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해외 진출 금융회사가 은행·증권업무의 겸업이 가능한 유니버셜뱅킹을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금산분리와 전업주의를 예외 적용하는 것은 해외진출의 일차적인 벽을 없애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면서 "국내 보험사가 현지 은행의 유통망 없이 영업조직을 구축하는 것은 맨땅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은데 많은 해외 금융회사들이 방카슈랑스(은행 창구에서 보험상품을 파는 것)로 시작하기 위해 은행·증권업에 진출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라고 말했다.
◇안전판은 만들지만…"국내에도 단계적 규제 완화 가능"=금융당국은 물론 규제를 완화하지만 안전판도 만들었다. 해외은행을 인수한 보험회사 등이 국내에 점포를 개설하는 것은 차단할 계획이다. 자칫하다가는 금산분리 원칙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업주의 원칙 역시 국내 금융회사에는 '한동안' 유지할 방침이다. 물론 겸업의 범위를 넓힐 계획도 갖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이 부수 업무를 하려면 신고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데 그 자체가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있어 절차를 간소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금융지주회사가 은행과 증권, 보험사 직원의 업무를 공유하는 방안도 고심하고 있다. 현재 금융지주회사 내의 다른 계열사 직원에게는 e메일 사용을 차단하고 폐쇄회로 카메라로 감시하며 업무상 교류를 막고 있다. 은행이 창구에서 보험이나 펀드 상품을 팔기는 하지만 이는 다른 회사의 상품을 위탁 받아 파는 것일 뿐 계열사 업무 공유는 아니다. 이른바 방화벽(차이니스 월) 원칙에 따라 은행 직원이 계열 증권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은행과 증권사 간에 고객정보를 공유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금융위는 이해관계가 없는 관리직 직원에 한 해 계열사 간 업무를 공유하는 일본 사례를 검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는 은행만 허용했던 펀드나 보험 판매를 증권사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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