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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축구사랑 뿌리는 항일운동"

1890~1920년대 신문·실록등 분석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서의 '붉은 악마' 현상으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유별난 '축구 사랑'이 항일투쟁의 성격을 띠면서 비롯됐다는 연구가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과정인 변성호씨는 축구가 처음으로 전래된 지난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발간된 신문과 잡지 17종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분석해 28일 이같이 주장했다. '스포츠를 통한 인정투쟁-일제식민지 시기 축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최근 외교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변씨는 "한국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ㆍ미국에서는 야구가 국기처럼 취급되는데 유독 한반도에서 축구가 인기를 끈 것은 일본과 대결해 이길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1910년대까지 11명 한 팀과 전ㆍ후반 각 45분 등 가장 기본적인 규칙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원시적이었던 한국 축구는 1921년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를 기점으로 급성장, 1926년에는 배재중 축구단이 일본 본토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축구단이 일본 원정에 나서 도쿄ㆍ상하이ㆍ조선ㆍ고려 등 네 축구단의 연합리그에서 3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조선축구단은 이듬해 내한한 일본 리죠(鯉城) 축구단과 1승1패를 기록했고 극동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우승한 와세다팀을 2승1패로 꺾었다. 1928년에는 당시 축구의 '메카'였던 상하이 원정에서 서양인팀과 대결해 4승2패의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선전에 힘입어 축구는 1930년대 민중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국기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3월1일자에서 '우리의 국기인 축구'라는 표현을 썼다. 변씨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조선 민중은 일본과 대결해 이기고 세계 무대에서 월등한 기량을 뽐내 국제적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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