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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신문지상에 대통령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실렸다. 지난달 29일 열린우리당 의원 및 중앙위원들과의 만찬 사진이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며 일부 의원들과 포옹을 하기도 했다. 4ㆍ15총선에서 승리한 뒤 가진 만찬이었으니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누구나 하루에 한두번은 웃고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웃음은 이전 것과 많이 달라 보였다. 하지만 되짚어봐야 할 것은 그 웃음에 같이 즐거워한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됐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대통령을 지지하고 열린우리당에 표를 던진 사람은 대통령의 웃는 모습에 흥분하고 기쁨도 같이했을 것이다. 그 반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조금은 다른 감정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이런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대선 때 다른 후보를 지지한 전체 투표자 가운데 절반, 총선 때 열린우리당에 표를 던지지 않는 절반 조금 안되는 사람들일 게다. 대략 절반이다. 대통령 웃음에서 희망을 웃는 얼굴은 보는 사람도 즐겁게 한다고 한다. 시인 겸 수필가인 피천득은 수필집 ‘인연’에서 “사람은 함께 웃을 때 친근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굳이 이런 고상한 말이 아니더라도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하는 게 우리네 풍습이다. 일반인들도 이럴진대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의 웃음은 그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웃음에서 희망과 비전을 읽고 대통령에게서 갈 길을 인도받고 싶은 게 국민의 욕심이다. 웃는 대통령의 표상은 미국 헌정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다. 그는 가벼워 보일 정도로 많이 웃어 일본 군부로부터 ‘헐렁한 샅바(Loose belt)’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벌거벗은 대통령이 축 늘어진 앞가리개를 차고 히죽 웃는 모습으로 희화화(戱畵化)되기도 했다. 대통령직이 얼마나 좋았길래 늘 웃고 다녔을까. 실상은 정반대였다. 결코 웃을 처지가 못됐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수렁에 빠져 경제는 최악의 위기였고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그 스스로도 신체적 어려움이 컸다. 다리가 마비되는 소아마비를 극복했지만 관절염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런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크게 두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뉴딜정책이라는 새 판으로 구렁텅이에 빠진 미국경제를 구해낸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웃는 대통령’이다. 절반의 반대에도 웃음을 대통령의 웃는 모습을 보고 같이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들을 포옹해야 마땅하다. 이들이 개혁해야 할 가진 자이건, 아니면 보수 ‘꼴통’이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대통령의 국민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스스로가 보수인지 아니면 진보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자신이 가진 자인지의 여부도 헷갈려 한다. 단지 다들 사는 데 힘들어할 뿐이다. 이것은 우리 경제가 위기냐, 아니냐의 논쟁과는 다른 얘기다. 이런 논쟁은 안 그래도 힘든데 짜증만 더해준다. 경제가 제대로 가고 있어도 사람들이 분열되면 위기이고 반대로 경제가 위기상황이어도 마음이 합쳐져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위기가 아니다. 바라건대 이제는 반대에도 환하게 웃어주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야만 마음이 합쳐져 헛바퀴만 돌고 있는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고 반목의 올가미도 끊을 수 있다. 몇 년째 학수고대하고 있는 경제회복도 그래야 가능하다. 사는 게 고단해도 웃으면서 힘을 북돋워주면 하루종일 춤출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지금 최소한 절반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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