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지난 1990년 이후 24년 만에 처음으로 전략비축유(SPR)를 '시험적'으로 방출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각각 세계 1위·3위 산유국인 러시아와 미국 간의 에너지 전쟁으로 번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권력의 판도변화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12일(현지시간) 미 에너지부는 전략비축유 500만배럴에 대한 입찰을 14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약 80일간 사용할 수 있는 전략비축유 6억9,600만배럴의 1%가 채 못되는 물량이다. 미국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2011년 리비아 내전사태 때 유가가 급등하자 전략비축유를 푼 적이 있지만 '시험방출'은 1990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처음이다.
미 에너지부는 "원유시장 붕괴사태를 가정해 정제부터 저장, 파이프라인 운송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라며 무력충돌 위기가 커지고 있는 크림반도와는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미 지난 여름 재고량이 늘어났을 때 계획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자치공화국 통합 의지를 꺾기 위한 압박용"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방출원유도 러시아산처럼 유황 함유량이 많은 '사워유'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미국도 원유수출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과시해 에너지를 우크라이나 분쟁 무기로 활용하고 있는 러시아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또 천연가스 공급원인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하려는 유럽·우크라이나를 측면 지원하는 효과도 있다. 특히 러시아 원유수출 감소에도 전략유 방출로 유가가 오르지 않으면 러시아 금융위기만 심화된다는 게 미 정부의 암묵적 경고다. 현재 러시아는 천연가스·석유 수출로 번 돈이 중앙정부 수입의 52%에 이른다.
발표시점도 정교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14일 런던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또다시 만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담판을 짓는다. 이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르세니 야체뉴크 우크라이나 총리와의 백악관 회동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 편"이라며 "러시아가 진로를 변경하지 않으면 미국과 국제사회가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를테면 비축유 방출이라는 무기를 들고 케리 장관과의 담판에서 러시아 측에 양보를 촉구한 셈이다. 현재 미 의회 역시 우방국에 대한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마이클 위트너 석유 부문 대표는 "미국이 러시아에 경고사격을 하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더구나 미국의 입김이 미치고 있는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보조를 맞출 경우 러시아가 받을 압박감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매니지먼트인스티튜트의 도미니크 치리첼라 선임 파트너는 "이번 전략유 방출량은 물량이 적지만 IEA가 동시에 움직이면 더 강한 메시지를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등 28개 석유소비국 모임인 IEA는 2011년에도 전략유를 동시에 푼 적이 있다.
나아가 LNG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패권이 깨질 것이라는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다.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의 제이슨 보도프 연구원은 "최근 미국은 물론 카타르·호주 등의 수출이 늘면서 과거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던 LNG 시장이 글로벌화하는 추세"라며 "공급량 증가로 러시아의 유럽 LNG 시장 지배도 점점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번 전략유 방출은 말 그대로 경고용으로 러시아에 실질적인 단기위협이 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석유 순수입국인 미국의 수출물량이 제한돼 있어 러시아의 원유 수익에 타격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현재 세계 원유 시장은 이란의 핵무기 협상, 베네수엘라·나이지리아 등의 정치 불안정 등 불안 요소가 널려 있는 실정이다.
그마나 수출 여유가 많은 LNG 역시 항구 등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데다 수출규제도 아직 까다로운 상황이다. 미 에너지부는 100억달러 이상의 투자가 필요한 LNG 공장 24개 신설계획을 내놓았지만 아직 단 한곳만 투자유치를 받았을 뿐이다. 수출이 활성화하더라도 업체들이 유럽보다는 공급가격이 더 높은 아시아로 눈을 돌릴 게 뻔하다. 러시아가 유럽에 제공하는 파이프라인 LNG 가격은 항구로 들어오는 LNG보다 63%나 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예측 가능한 미래에 러시아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에너지 수출국으로 남을 것"이라며 "유럽도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관계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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