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무서웠다. 때론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이헌재ㆍ정건용ㆍ김석동… .'
요즘 젊은 금융 관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들의 선배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내 생각할 것이다. "요즘 관료들은 꽝이야!"라고. 이재과장(지금의 금융정책과장), 고작해야 이재국장 타이틀을 달고도 시장을 호령했는데 요즘 시장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모습은 두려움은커녕, 일그러짐 투성이니 화가 날 법하다.
솔직히 학벌만 보면 선배들에게 뒤질 것이 없다. 힘들다는 외국어고를 졸업해 서울대 법학과나 경제학과를 나온 수재들이 모인 것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장은 '천재 대접'을 할 생각을 안 하니 속이 상할 만도 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시장이 발달해 당국이 개입할 부분이 줄어든 탓이다. 관료 말 한마디로 회사 명운이 엇갈리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 환경은 확실히 변했다. 스스로 돈줄을 조달할 수 있는데 관의 눈치만 볼 이유가 없어졌다. 국회 힘이 워낙 세져 관료에게 몸을 의탁할 필요 또한 줄었다. '관치'를 두려워할 공간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옛 재무관료(모피아)들이 뭉치면 금융 회사 하나쯤 공중 분해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다. 요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얘기하다 보면 절반은 관료들에 대한 비판이다. 타깃도 고위 관료가 아니라 과장과 서기관ㆍ사무관이다. 나이래야 고작 40대 중반인 그들에게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의문이겠지만 얘기를 듣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종합하면 참 단순하다. "젊은 관료들이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온실 속 화초 같아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철학에 맞다 싶으면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는데… . 머리 속에 '건전성'만 가득해요. '새로운 먹거리'얘기는 수사(修辭)일뿐입니다."(2금융권의 한 대표)
의례적인 불만인지, 현실이 그런지 따져봤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80% 이상은 맞는다는 것이었다. 은행과 보험은 물론이고 카드와 저축은행ㆍ대부업에 이르기까지 지금 금융회사들은 비명 일색이다. 돈 벌 구석은 없는데 관료들은 규제만 쏟아낸다. 돈을 못 버니 건전성이 떨어지고 이를 채우기 위해 자산을 팔라는 것이 관료들의 요구다. 오죽하면 "이런 정책은 나도 하겠다"(2금융권의 다른 대표)는 말이 나오겠는가.
문제가 되는 기업 구조조정만 해도 그렇다. 동양 사태도 선배 관료들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동양 문제가 불거진 지는 1년이 넘었다. 지난해 말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회사채 대책을 운운할 때부터 사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료들은 '어어~'만 외쳤다. 대책을 만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피(구조조정의 힘든 과정)를 왜 내가 묻혀야 하느냐"는 것이 본심이었다. 그리고는 모든 책임을 금융감독원에 떠넘겼다. 초기에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면 동양은 물론 STX나 웅진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김준기 동부 회장이 평생의 꿈으로 삼았던 반도체 사업을 내놓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관료들이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통에 기업인들만 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관료들은 걸핏하면 '변양호 신드롬'을 말한다. 일을 벌였다가 앞날에 걸림돌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또한 과분한 표현이다.
그들은 원천적으로 두 가지의 줄(건전성, 새로운 먹거리) 중 하나(먹거리)를 버리고 일하고 있다. 전형적인 아마추어들의 외줄타기다. 그것도 푹신한 매트리스를 깔아 놓고 벌이는 외줄타기다.
정책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젊은 관료들은 "요즘 후배들에게 나라에 대한 공명심을 찾기 힘들다"(경제 부처 1급)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그렇게 몸보신만 하려면 지금이라도 관직을 버리고 돈 많이 주는 민간회사로 가는 편이 나라를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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