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동양과 STX 구조조정 사태를 겪은 후 금융 당국과 채권단의 구조조정 방향에는 빠짐없이 '선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부실이 불거지기 전에 빠른 구조조정을 유도해 기업을 살리고 시장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다.
이에 따라 올해 주채무계열 선정 기준은 강화(신용공여액 0.1%→0.075%)됐고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 대상은 14곳(지난해 6곳)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현대·한진·동부그룹 등 부실 우려가 보이는 그룹에 대해서는 당국이 연초부터 강하게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속도를 내는 듯하던 선제적 구조조정 방침은 동부그룹에서 완전히 어그러졌다. '포스코의 동부 패키지 인수'라는 당국의 각본이 차질을 빚자 동부그룹은 연쇄적인 계열사 자율협약 또는 워크아웃 위기에 몰리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다른 그룹에서도 이 같은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룹 자구계획안의 큰 틀이 대부분 '자산매각'으로 구성돼 있는데 활력을 잃어버린 시장에서 핵심 매물이 소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실 대기업이 늘고 구조조정을 위해 자산을 팔려 해도 제때 팔리지 않고, 그러는 동안 부실이 심화하는 악순환의 모형이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동부 사태로 은행들마저 여신심사를 보수적으로 하면서 돈줄을 조이고 있다.
당국의 조정능력도 이번 동부 사태를 계기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한 신용평가사의 고위관계자는 "2~3개 그룹은 하반기 추가 위험권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6개 대기업 그룹 채권단과 최근 약정 체결=올해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 대상 14곳 가운데 현대·한진·동부와 이미 워크아웃 또는 자율협약을 추진 중인 성동조선 등 5곳을 제외하면 6곳이 신규 약정 체결 대상이다. 건설·철강 등의 업종이 대부분인데 동국제강을 포함해 대성·대우건설·한라·한진중공업·현대산업개발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그룹은 최근 채권단에 자구계획안을 제출하며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 가운데 대우건설과 현대산업개발 등은 비교적 부채비율이 양호해 유상증자 계획은 없으며 대부분 미분양 해소를 통한 현금 유입 확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부채비율이 높은 대성산업은 1,190억원 규모의 기흥역세권 부지를 매각하기로 했고 한진중공업도 사옥과 부산 R&D센터를 매각하고 오는 8월에 2,400억원 규모의 유증을 단행할 예정이다. 동부와 마찬가지로 철강업황 부진에 시달리는 동국제강은 유상증자와 함께 본사 사옥인 페럼타워를 유동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자구계획안 곳곳에서 차질…늦어지는 구조조정=문제는 이들 그룹이 내놓은 자산이 시장에서 빠르게 소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진중공업은 당초 사옥과 부산 R&D센터를 지난 4월까지 매각해 5월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 1,500억원을 상환하려 했지만 투자자 모집이 난항을 겪자 자체자금으로 이를 상환하고 매각을 재추진하고 있다. 대우건설도 인천 송도에 보유한 쉐라톤호텔 매각을 지난해 말부터 추진했지만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일부 그룹의 자산매각안을 놓고 채권단과 그룹 간에 갈등이 빚어지는 조짐도 보인다. 동국제강은 최근 알짜 빌딩인 페럼타워 매각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채권단은 매각 방식을 달리해서라도 일부 유동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채권단 관계자는 "일부 그룹의 자산매각이 늦춰지는 것이 당장의 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동부 사태의 여파가 있는 만큼 보다 속도를 내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우려 커지는 시장…2~3개 그룹 위험권=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융권에서는 신규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 기업들 가운데 '제2의 동부 사태'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산매각 지연→회사채 만기 도래→계열사 지원 한계 봉착→워크아웃 또는 자율협약 순으로 구조조정이 확산될 수 있다는 것. 이들 약정 체결 기업들 외에도 올해에는 효성과 이랜드가 관리대상계열로 편입되는 등 잠재적인 위험 대상 그룹들이 늘어났다.
신평사들이 최근 이들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 그룹에 대해 일제히 신용등급을 강등한 것도 시장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신평사들은 이달 동국제강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A(긍정적)에서 A(부정적)로 일제히 조정했다. 그룹에 대한 자금지원에 나선 대성산업가스의 신용등급도 BBB+로 하향 조정됐다.
여기에 동부 사태 여파로 금융권의 여신 규모가 축소되고 회사채 시장 투자자들의 심리가 움츠러들면서 이들 기업의 자금조달이 점차 어려워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연내 BBB 등급 이하 회사채 만기 규모가 2조원에 육박하는 가운데 동국제강이 당장 9월에 2,500억원, 한진중공업이 11월까지 총 3,000억원의 회사채 만기가 도래한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부행장은 "동부 사태가 어떻게 진정되느냐 여부에 따라 이들 기업에 대한 시장의 반응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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