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11월 가출한 여학생을 때려 숨지게 한 후 시신을 토막낸 혐의(살인)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원모씨 등 7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징역 3년에서 8년까지 형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심 재판부는 일부 피고인의 형을 감해주기도 했다.
당시 살인죄에 대한 양형 기준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재판부의 양형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나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 형법 250조에 따르더라도 징역 3년은 최소한의 양형 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초등학교 선배를 살해하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택시강도짓을 벌여 기소된 전모(49)씨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감형 또는 가석방으로 이 세상에 또다시 나올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동일한 사건이 아닌 만큼 같은 잣대로 재판부의 양형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살인에 대한 재판부의 양형 차이가 너무나 컸던 게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강력 범죄 중 특히 살인죄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을 놓고 고무줄 양형 논란은 이어졌다. 결국 대법원은 수년간 지속된 양형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지난 2009년 4월 살인죄 양형 기준을 마련했다.
살인 유형을 참작 동기 살인, 보통 동기 살인 등 총 5개로 나눴으며 유형별 형량도 구체화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피해자로부터 친족이 장기간 폭력을 당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은 경우 등 살해 동기에 있어 참작할 사유가 있는 참작 동기 살인의 기본형은 4년에서 6년으로 정했고, 가중요소가 있을 경우 최대 8년을 선고하도록 했다.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 가정불화로 인한 살인 등 보통 동기 살인의 경우는 기본형을 9년에서 13년형으로 정하고 최대 17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살인을 하거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살인 등의 비난 동기 살인의 경우에는 기본형을 12년에서 16년으로 정하고 최대 무기 이상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강간살인, 강도살인, 인질살해 등 중대범죄 결합 살인은 기본형을 17년에서 22년을 정하고 최대 무기 이상을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 기준을 정했다.
살해욕구를 위해 2명 이상을 살해하는 등 극단적 인명경시 살인범에 대해서는 기본형을 22년에서 27년을 정하고 최대 무기 이상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양형 기준이 만들어 진 이후에도 살인죄에 대한 양형 논란은 지속됐다. 양형 기준이 없었던 기간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지난 2007년 7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살인죄 피고인 637명에게 선고된 형량은 징역 3년에서 무기징역까지 다양했다.
같은 유형에서도 선고된 형량의 차이가 컸다.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 등 보통 동기에 의한 살인의 경우 징역 3년~무기징역이 선고됐고, 비난할 사유가 있는 살인은 징역 8년~무기징역까지 선고됐다.
때문에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원의 양형 편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판사의 재량 범위를 줄일 수 있는 양형기준법을 도입하고 권고만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양형기준 준수를 의무화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 대형 법무법인 관계자는 "살인죄 양형은 국민의 법 감정보다 낮은 편"이라며 "살인죄에 대한 고무줄 양형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형 기준 준수율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살인죄 양형 기준 준수율은 양형 기준안이 처음으로 마련된 지난 2009년 하반기 87.9%와 2010년 89.9%, 2011년 89.7& 등으로 90%를 넘지 못해 강력범죄 가운데 90%를 웃도는 강도죄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대법원은 여전히 판사의 재판권 등 사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양형기준법 도입과 양형기준 준수 의무화에 반대하고 있다. 다만 양형 상향 조정에 대한 공감대가 이어지면서 최근 살인범죄에 대한 수정된 양형기준안을 마련했다.
수정된 양형 기준에 따르면 범행에 참작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살인 범죄에 무기징역 이상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유형별 살인에 대한 기본 양형도 이전보다 대부분 높아졌다.
극단적으로 인명을 경시한 살인의 경우 기본 징역 23년 이상부터 무기징역 이상을 선고토록 하고, 가중 요소가 있는 경우 무기징역 이하로는 선고할 수 없도록 했다.
아울러 법원은 소송 당사자들이 양형에 대해 승복할 수 있도록 살인과 강도 등 주요 강력범죄에 대해서는 양형 결정(형벌의 수위나 기간을 결정하는 것)을 공개 재판을 통해 정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오는 7월까지 전국 법원의 7개 합의부와 8개 단독 재판부를 지정해 '양형심리모델'을 시범 적용할 계획이다.
양형심리모델이 적용되면 법관은 범죄 유형, 양형 가중ㆍ감경 사유, 권고 형량 범위, 집행유예 여부 등에 대해 소송 관계인의 법정 의견을 듣고 공방 과정을 거친 뒤 양형을 최종 결정하게 된다. 법원은 이 제도를 통해 양형심리 절차를 정형화·객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 동안 법정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사실관계만 다투고 양형은 법관 혼자서 결정하면서 소송당사자들이 법원의 양형을 불신 할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양형심리모델은 소송 당사자에게도 양형에 대한 의견을 적극 개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실시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고무줄 양형 논란이 줄어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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