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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스페인 가톨릭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청빈·금욕의 삶으로 '탐욕에 눈 먼 교회' 깨우다

이냐시오 성인이 깨달음을 얻은 후 고해성사를 치른 몬세라트 대성당과 수도원. 그는 성당의 제단에 기사의 상징인 칼을 바치고 만레사의 동굴로 고행을 위해 찾아간다.



이냐시오 성인이 깨달음을 얻은 후 고해성사를 치른 몬세라트 대성당.

이냐시오 성인이 태어난 로욜라의 대성당.

데레사 성녀가 33년간 머물렀던 스페인 아빌라의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적 고향 예수회 설립자 이냐시오 성인
황폐한 귀족의 삶 버리고 가난한 성직자의 길 선택
만레사 동굴수행 중 깨달음 구하고 예수회 터 닦아
反종교개혁운동 선봉 역할… 개신교세력 확산 차단


올해로 탄신 500주년… '맨발의 가르멜회' 세운 데레사 성녀
매질 당하는 '십자가의 예수' 환영 접하고 각성
추운날에도 맨발에 샌들… 검소·절제 스스로 실천
신비한 꽃향기 풍기는 무덤엔 여전히 순례 행렬


종교개혁의 시작은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사회가 빠른 속도로 붕괴하는 가운데 상업의 발달은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스페인·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아비뇽 유수' 등 교황권의 몰락 역시 교회 개혁을 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교회의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타락, 과도한 세금 부과로 교황청은 민심까지 잃었다. 결국 루터가 교회 비판의 전면에 나서자 농민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를 지지한 제후들의 후원이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1517년 10월31일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를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은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반향을 낳았고 스위스의 츠빙글리·칼뱅으로 이어졌다. 결국 기존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로 갈라졌다. 가톨릭이라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개신교에 대한 대책과 가톨릭 교회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교황 바오로 3세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일선 교회·수도원에서도 자정·개혁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가톨릭 전통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 중 하나인 스페인에서도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속된 예수회 설립자 이냐시오 성인, 그리고 '맨발의 가르멜회' 설립자 데레사 성녀가 대표적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함께 이달 초 돌아본 스페인 성지는 바로 이 두 기독교 성인의 발자취다.

지난 2013년 3월 취임한 교황은 자신의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랐다. 예수회 474년 역사상 첫 교황인 그가 굳이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성인 이름을 원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금세 풀렸다. 당선이 확실해지는 시점에 한 추기경이 건넨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명예와 부를 탐하며 방탕한 20대를 보냈지만 회개하고 모든 것을 버린 채 평생 가난한 이를 위해 살았다.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성인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글을 읽으며 모범으로 삼았고 두 성인 모두 교회 개혁에 힘썼다. 그래서일까. 이냐시오 성인이 회개하는 과정도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아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 독일 뮌헨을 거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까지 환승 대기시간 포함 꼬박 16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 및 기념성당이 있는 북부지역의 로욜라는 여기서 다시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거리의 빌바오를 거쳐, 버스를 타고 또 1시간여를 가야 한다.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이냐시오는 기사로서의 명예를 열망하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지만 1521년 프랑스군과의 교전에서 다쳐 요양하던 중에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전환점을 맞는다. 기사로서 삶이 스스로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 뿐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즈음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한 그는 결국 회심의 길로 들어선다.

이냐시오가 가톨릭에 눈을 뜨는 로욜라의 생가 및 기념성당 관리책임자인 아이노아 빌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가톨릭 예수회 본원은 현재 로마에 있고 이곳은 1540년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성인이 태어난 모원입니다. 현재 예수회 신부·수사 55명이 거주하고 있고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성센터와 도서관·고문서보관소 등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연간 10만여명이 찾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방문자가 25% 늘어났습니다. 특히 한국인 방문자는 연간 4,000여명으로 인구 대비로는 가장 많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가톨릭으로 다시 태어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고해성사. 몬세라트 대성당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기사의 상징인 칼을 제단에 바친다. 몬세라트는 스페인 동부 해안도시 바르셀로나에 인접한 도시다. 이듬해 몬세라트에서 15km여 떨어진 만레사 마을의 동굴에서 기거하며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며 구걸로 생계를 이어간다. 현재는 이 동굴 자리에 성당보다 작은 규모의 성소인 경당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이후 11년간 학문에 정진하며 정신적 동료를 규합한다.

그리고 1537년 동료들과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 교황청으로 가는 길에 성부가 그를 예수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는 환시를 보게 된다.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과 함께. 이후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스스로를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고 불렀고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를 확인해줬다. 이냐시오는 1556년 로마에서 열병으로 선종했고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됐다. 저술로 '영신수련'을 남겼다.

그가 창설한 예수회의 최대 공적은 교황청의 반(反)종교개혁운동의 선봉에서 개신교 세력이 알프스 이남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는 점. 또 오스트리아·폴란드·독일 등 이미 개신교 영향권 내에서도 영주들과 접촉해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리는 데 애썼다.



이 같은 예수회의 특징은 크게 교황에의 절대 복종과 현지 적응주의 선교, 두 가지다. 예수회 회원은 청빈·정결·순명 외에 교황에의 충성서약(선교서약)을 추가한다. 교황의 명령이라면 세계 어디라도 달려가고 기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도복도 입지 않고 함께 모여 시편 찬송도 하지 않는다. 또 적응주의 선교란 어느 지역에서든 토착지역 문화 속에 복음이 싹트도록 하는 것.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관리가 돼 상류층을 먼저 선교하고 유교의 상제(上帝)·천(天) 사상을 받아들여 조상제사와 공자 숭배 역시 인정했을 정도다.

데레사(1515~1582) 성녀의 출생지인 아빌라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km, 넉넉히 2시간이면 닿는 거리에 있다. 해발 1,131m 고도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은 로마시대 성벽이 지금까지도 잘 보존돼 있다. 회교도와 기독교도 간 300여년의 공방을 주고받은 아빌라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099년. 높이 12m, 평균 너비 3m, 전체 길이 2,526m의 성벽은 여전히 도시 중심을 감싸며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유대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레사 성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수녀원에서 교육받다, 18세 때 수녀가 되기 위해 가르멜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중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매질을 당하는 환영을 접하고 또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읽고 크게 각성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수녀원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건하고 소박한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초기교회에서는 외딴곳에서 머물며 사람들과의 접촉 없이 홀로 수도생활을 했다면 중세에는 하나의 스승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형태가 됐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자들과 소통하며 영적 조언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변질돼 지역 유지나 권력자의 후원에 기대고 그 입김에 휘둘리게 된다. 나중에는 많은 돈을 기부한 귀족 부인이 노년에 하녀와 많은 짐을 끌고 수도회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경우까지 생겼다.

보다 엄격한 수도 규율을 통한 경건한 신앙생활을 추구했던 데레사 성녀는 1567년 별도의 가르멜수도회, 즉 '맨발의 가르멜회'를 만든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양말 없이 샌들만 신고 다닐 정도로 검소함과 절제를 강조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 현재는 원래 가르멜수도회는 거의 사라지고 '맨발의 가르멜회'가 대부분이다. 이듬해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 수사에 의해 첫 남자 수도원이 창립되고 이후 20여년 스페인 전역에 남녀 수도원 17곳을 세우는 업적을 남긴다. 이 두 성인 덕분에 '성인들의 아빌라'로 불리는 이곳에는 현재 아빌라 대성당과 산타데레사 수도원, 엔카르나시온 수도원, 산호세 수도원 등이 위치하고 있다.

50여년째 데레사 성녀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다니엘 데 파블로 마로토(78) 비센테 로돈도 '맨발의 가르멜' 수도원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하느님과 교회를 잇는 중계자이고 교회는 예수와 신자를 잇는 중계자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가톨릭의 그러한 개념을 저술로써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보았다'고 한 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봤다는 의미를 넘어 예수의 현존을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대화한 구체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일정 수준의 고행, 금욕생활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맨발의 가르멜회'는 그렇게 설립됐습니다. '맨발'의 의미는 세속적인 욕망과 관계를 벗는다는 것이고 희생 없이 어떤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1시간30분여 달리면 알바데토르메스, 데레사 성녀가 세운 8번째 수녀원이자 그의 유해가 있는 가르멜회 수녀원이 나온다. 이제는 조용한 시골마을이지만 예전에는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이곳 성녀의 무덤에서는 사후에도 신비한 꽃향기가 풍겨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학자들이 무덤을 다시 열었을 때 유해는 전혀 썩지 않은 상태였다. 이를 기적의 증거로 본 수도회 측에서는 성녀의 심장과 오른팔을 떼어내 성 데레사 성당에 그의 유해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성녀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됐다.

데레사 성녀의 또 다른 업적으로는 바로 16세기 교회에 영적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 '자서전'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영적 보고' 등을 통해 자신의 영적 여정에 대해 소개하고 더 많은 이들이 기도와 묵상·관상을 통해 같은 경지에 오르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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