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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치권의 심판 매수


백광열


시장경제 체제가 유지·발전하려면 법과 규칙이 지켜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증명됐듯이 민관유착에 따른 정부 관리감독 기능의 붕괴와 무분별한 규제완화·이익추구의 폐해는 엄청났다. 정부는 독과점 및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것을 막고 합법적인 시장경쟁, 정당한 사회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다. 정부든 정부를 감시·견제하는 정치권이든 정확하고 엄격한 법령과 규칙을 필요로 한다. 이를 어길 경우 가차 없이 처벌해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

판사·언론인 서구선 정치 금지 불문율

정부와 정치권 못지않게 양자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심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대법관 등 고위직 판사, 감사위원, 영향력 있는 언론인 등을 꼽을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들이 정치를 못 하거나 안 하는 전통과 불문율이 있다. 심판이 선수로 뛰겠다고 나서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려는 판사는 정치 기반을 닦기 위해 특정 정당에 유리하거나 자신의 인기 관리에 도움이 되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판사와 법원의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선진국에서 대법관 출신은 일반적으로 변호사 활동을 못한다. 대법관 제도가 준(準)종신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대부분 대법관으로 일하다 은퇴한다. 대법관 출신 인사들조차 로펌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전관예우 특혜를 누리는 우리와는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서구 사법계 전통을 모를 리 없는 국내 사법계의 눈가림과 국민의 무지(無知)로 국내 사법제도의 조직적 부패는 계속돼왔다. 미국 좋아하는 국내 학자들은 왜 전관예우를 제도적으로 막는 미국 등 선진국 사법계의 전통을 부각하지 않는가.



판사는 모든 일을 흑과 백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정치는 절대적인 정의도 불의도 없는 타협의 영역이다. 항상 옳거나 그른 것도 없다. 그래서 판사는 정치할 자격이 없다. 정부나 정권을 장악한 여당을 상대로 감사를 해야 하는 감사위원, 정부·사회·정치권에 대한 파수꾼이자 심판 역할을 해야 하는 언론인도 대법관과 마찬가지로 정계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 정계로 진출하려는 기자라면 특정 정당에 유리한 기사를 쓰려 할 것이다. 이런 기자가 많을수록 언론의 중립성과 신뢰, 감시자로서의 기능은 무너지고 사회는 부패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가 높았던 월터 크롱카이트 전 NBC방송 앵커가 부통령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정치를 하면 앞으로 국민들이 모든 언론인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후배들이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절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민주체제 유지하는 심판 역할해야

우리나라에서는 정당과 정치인을 감시해야 할 판사나 언론인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권 주변을 기웃거리다 손짓만 하면 맨발로 뛰어나가 충성을 외치거나 문전에서 패가망신하는 법조·언론인이 넘쳐난다. 심판은 선수가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되지만 한국의 정치권은 심판을 자기 편 선수로 만들거나 오심(誤審)을 조장한다. 전직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낸 여당이나 전직 앵커를 대통령 후보로 낸 야당이나 피장파장이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민주주의 확립이나 국민복지에 있지 않다. 정권탈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일하기 바라는 어리석음은 권투 선수가 주먹을 안 쓰고 군인이 전투를 안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비논리적이다.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정치권의 부패를 막으려면 정치권을 감시하고 규칙을 어긴 정치인을 가차 없이 벌주는 심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체제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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