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달러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신흥국으로 몰렸던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청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려 2조달러(약 2,100조원)로 추정되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크거나 정정불안에 시달리는 일부 신흥국이 금융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도 속출하고 있다.
29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달러 강세의 여파로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이탈하면서 신흥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캐리 트레이드는 미국 등 저금리 국가에서 돈을 빌려 신흥국 등의 고위험·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기법이다. FT에 따르면 신흥국 채권에 투자된 외국인 자금은 현재 2조달러로 추산된다. 이는 인도네시아와 멕시코 경제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에서 싼 자금을 빌린 투자가들이 몰리며 신흥국 채권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은 2007년 8%에서 2012년 17%로 급증했다.
하지만 최근 강달러 행진이 이어지면서 캐리 트레이드에도 역풍이 불고 있다. 신흥국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신흥국 투자에 따른 금리차익보다 환차손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ICE달러인덱스는 사상 최장기간인 11주 연속 오르며 2010년 6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신흥국 통화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최근 MSCI신흥시장통화지수는 달러 대비 6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상태다. 브라질 헤알화 가치는 이달 들어 7.6% 급락하며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을 나타냈고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올 들어 20%나 추락했다. 터키 리라화,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도 이달 들어 5% 이상 빠졌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것도 캐리 트레이드에 위협 요인이다. JP모건체이스 글로벌외환시장변동성지수는 7.95%로 3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씨티은행의 루이스 코스타 외환전략가는 "유동성이 넘치고 저금리가 이어지던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마침내 캐리 트레이드 전략에 금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캐리 트레이드 전선에는 이상 조짐이 가시화하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8월 신흥시장 채권 발행액은 220억달러로 지난 1년간 월 평균인 620억달러의 3분의1 수준으로 급감했다. JP모건에 따르면 신흥시장 평균 채권 수익률도 7월의 6.45%에서 최근 6.69%로 올랐다. 그만큼 채권 가격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캐리 트레이드 자금에 의지해 시중금리를 낮추고 경상적자를 메워온 신흥국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게 FT의 설명이다.
물론 아직 본격적인 캐리 트레이드 청산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 전망에도 유럽과 일본이 양적완화 조치를 지속하고 있는 게 버팀목이다. 문제는 미 경제 회복과 중국 경기 둔화, 우크라이나·홍콩 등의 지정학적 사태 등을 감안하면 달러 가치가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일단 환차손을 견디지 못한 투자가들의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시작되면 쏠림 현상으로 '신흥국 자산가치 급락→통화가치 하락→자산투매 가속화'의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는 벌써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희생양이 누구냐"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FT는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 비중이 높은 말레이시아(외국인 비중 45%)와 폴란드·헝가리·멕시코·인도네시아(각각 35%) 등을 취약국으로 지목했다.
씨티그룹의 경우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남아공·브라질·러시아·나이지리아를 연준 금리인상시 최대 위험 국가로 분류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달러 강세의 여파로 원자재 수출 가격이 하락하면서 내년 경상적자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인도·터키는 취약5개국(fragile five) 국가로 분류되지만 제조업 상품 수출 의존도가 높아 경상수지가 개선되고 있다는 게 씨티그룹의 분석이다.
아울러 씨티은행은 통화선물 가격으로 미국과 신흥국 간의 금리차이를 분석한 결과 이스라엘 통화인 셰켈, 체코 코루나에 투자한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손실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신용평가사 피치는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 대외부채가 많고 외환보유액은 적은 일부 신흥국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정치 리스크가 큰 터키와 몽골·우크라이나·엘살바도르·헝가리·레바논·자메이카 등을 지목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