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신입사원 때부터 사장에 오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봉급쟁이'입니다. 저는 이제껏 단 한번도 저 스스로를 봉급쟁이라고 생각하며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영관(사진) 도레이첨단소재 사장은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본사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장수 비결로 '주인의식'을 꼽았다. 그저 남들처럼 '월급쟁이'라는 틀 안에 갇혀 수동적으로 살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할 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사장은 지난 1999년 당시 도레이새한 대표이사에 오른 뒤 올해로 13년째 회사를 이끌고 있는 재계의 대표적 장수 CEO다. 대기업의 임원은 '임시직원'의 준말이라는 서글픈 농담이 나돌 정도로 기업체 임원의 수명은 파리 목숨처럼 불안정한 게 사실이다. 이 같은 불투명한 기업 환경 속에서도 무려 13년 동안이나 한 회사의 수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봉급쟁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사장은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책임감과 무슨 일을 맡겨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항상 최고가 되겠다는 열정이 나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며 "주인의식을 갖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함께 독려해가며 일할 수 있어 궁극적으로는 조직의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 사장이 장수 CEO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재임기간에 보여준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그가 도레이첨단소재의 첫 사장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2000년 4,325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1조2,819억원으로 11년 만에 3배가량 늘었으며 같은 기간 320억원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은 2,062억원으로 무려 7배 가까이 급증했다.
눈부신 성장세는 미래사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레이첨단소재는 오는 2020년 매출 5조원, 영업이익 5,000억원을 달성한다는 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이를 위해 2020년까지 총 2조3,000억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도레이첨단소재의 이 같은 비전을 실현해줄 첫 번째 시험대는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탄소섬유다. 도레이첨단소재는 구미공장에 연산 2,200톤 규모의 탄소섬유공장을 짓고 내년 1월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간다. 이 사장은 탄소섬유가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갈 '4번 타자'라고 자신했다.
"탄소섬유는 철보다 10배나 강하지만 무게는 4분의1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단단한 정도를 나타내는 탄성률은 철의 7배입니다. 말 그대로 꿈의 신소재인 셈이죠.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비행기와 미사일은 물론 골프채ㆍ낚싯대ㆍ자전거에 이르기까지 탄소섬유는 우리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연비를 높이기 위해 항공 업계와 자동차 업계가 경량화에 목숨을 걸고 있는 만큼 2015년을 기점으로 탄소섬유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 탄소섬유 시장은 약 4만5,000톤 규모지만 2020년에는 13만톤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맞춰 도레이첨단소재는 2020년까지 탄소섬유 투자에만 1조3,000억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같은 기간 회사 전체 투자금액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탄소섬유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비싼 생산원가는 탄소섬유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에 대해 이 사장은 수요증가에 맞춰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진다면 생산단가도 충분히 떨어뜨릴 수 있다고 낙관했다. "보잉사의 787 항공기를 전부 알루미늄으로 만들 경우 60톤의 무게가 들지만 날개와 동체를 탄소섬유로 바꾸면 무게가 40톤으로 줄어 그만큼 연료도 30~40%나 적게 쓸 수 있습니다. 1.4톤의 자동차도 무게를 1톤까지 줄일 수 있죠. 물론 아직까지는 우주항공 산업이나 스포츠 레저 분야를 제외하고는 수요가 적다 보니 생산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내년 상업생산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구미에 연간 1만4,000톤 규모의 생산시설이 구축된다면 지금보다 생산단가도 훨씬 낮출 수 있습니다."
그는 탄소섬유 생산을 앞두고 있는 국내 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현재 국내에서는 태광산업과 효성이 탄소섬유 시장에 뛰어든 상황이다. 이 사장은 "이론적으로 탄소섬유는 누구나 만들 수는 있지만 실제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생산ㆍ가공하는 데는 수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도레이첨단소재의 모기업인 도레이가 1971년 탄소섬유를 처음 생산한 이래 전세계 탄소섬유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앞선 기술력과 노하우를 토대로 시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사장이 탄소섬유와 함께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하는 또 다른 분야는 수처리 사업이다. "2030년이면 전세계 물 부족 인구가 39억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도 가장 물이 부족한 국가로 수요에 비해 수자원은 40%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당연히 수처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죠."
도레이첨단소재는 2020년까지 수처리 사업에 약 3,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우선 올해 일본 도레이에서 막을 들여와 필터를 생산하고 2015년부터는 필터에 들어가는 여과막까지 직접 만들어 판매할 계획이다. 이 사장은 "한국 건설 업체들이 최근 중동에서 잇따라 수주에 성공하고 있는 해수담수화 플랜트에 들어가는 제품의 상당수는 일본산"이라며 "하지만 우리의 수처리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찍힌 제품을 사용한 온전한 한국산 플랜트가 해외시장을 휩쓸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이미 아시아 1위를 달리고 있는 부직포 사업의 해외시장 공략 계획도 밝혔다. "이미 저출산 시대에 접어든 한국ㆍ일본과 달리 중국은 아직 2세 이하 영유아 인구 4,200만명의 25%만이 기저귀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향후 유아용 기저귀 시장의 성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산아제한이 없는 인구대국 인도 역시 2017년부터 폭발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지역이죠. 유아용 기저귀의 원료로 사용되는 부직포 사업의 미래가 밝은 이유입니다. 이미 가동 중인 중국과 내년 3월에 완공될 예정인 인도네시아 현지 생산공장을 거점으로 해외시장 공략을 본격화할 방침입니다. 또 2020년에는 남미 공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고요."
전문경영인인 이 사장이 거침없이 회사의 성장 비전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를 전적으로 믿고 맡겨준 일본 도레이 본사의 경영방침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레이는 도레이첨단소재의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해외투자에 있어 도레이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지속적인 투자를 한다는 점입니다. 현지 법인의 자율경영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죠. 또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의 대부분은 다시 신사업 투자에 쓰도록 독려합니다. 대신 도레이는 은행 이자율 수준인 초기 투자금액의 5% 정도만 배당금으로 가져갈 뿐입니다. 도레이첨단소재가 미래 신사업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셈이죠."
일본계 기업의 한국인 수장으로서 그는 외국인직접투자(FDI)를 늘리기 위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의지도 강조했다. 이 사장은 "외투기업 생산액이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정부는 기술도입이나 공장건설ㆍ세제혜택ㆍ노사문제 등의 관련 인프라 확충에 더욱 주력할 필요가 있다"며 "더욱이 대일 무역적자가 한해 300억달러에 달하는 현실에서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를 계속 늘려간다면 무역역조 현상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올 상반기 일본의 대한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96%나 늘어나며 FDI 증가를 견인했다.
직원 가족까지 이름 줄줄… 사람과 소통 가장 중요시 김현상기자 kim0123@s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