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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상((像)은 지난 40여년간 서울의 최고 명물로 자리잡았지만 제작과정은 베일에 가려 있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도 장군상 내부 보수작업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최근 장군상 제작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증언이 잇따라 보수작업이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시는 1968년 장군상 동상 제작에 참여했던 조각ㆍ주물 전문가 6명과 제작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1명에게서 당시 주물작업 및 기단부 시공방법에 대한 자료와 증언을 확보했다고 29일 밝혔다. 서울시는 이들이 기증한 기록물ㆍ사진ㆍ영상물 등 소장자료를 정리해 장군상 보수에 참고하고 이를 장군상에 얽힌 스토리텔링 소재로 발굴할 계획이다. 증언에 따르면 장군상은 점토로 본을 뜰 때까지만 해도 높이 5m 규모로 계획됐다. 하지만 세종로가 100m로 확장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6.5m로 변경됐다. 이 때문에 당시 투명 플라스틱 천장으로 된 가설작업장을 뚫어 투구 부분의 점토 조각을 완성했다. 장군상 운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수입해온 최신 크레인이 동원됐다. 8톤에 달하는 장군상을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은 당시 단 1대에 불과했다. 크레인을 운전했던 이기종(72)씨는 “청평댐에서 크레인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내일 아침 광화문사거리에서 충무공 동상을 들어올려야 하니 크레인을 긴급 출동시키라’는 연락이 와 서울로 밤새 이동해 작업했다”고 말했다. 동상 주조는 성수동에 있던 대광공업사에서 진행됐다. 대광공업사에서 주조기술자로 일했던 김주남(65)씨는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구리 공급이 어려워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가져온 탄피를 사용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물이 제대로 주입되지 않아 탄피 대신 해체된 선박에서 나온 엔진ㆍ놋그릇ㆍ놋숟가락 같은 일반고철 등이 투입됐다.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주조된 동상 몸체를 결합하는 과정에서는 동상 재료와 같은 성분의 용접봉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부산 미군부대에서 구해온 구리 용접봉이 사용됐다. 하지만 동상 외부는 전체를 용접한 반면 내부는 일부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장군상 내부에 많은 균열이 생긴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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