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21일 오전6시15분, 필리핀 레히테만 인근 해역. 함포 사격을 위해 항진하던 연합국 함대를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공습편대가 덮쳤다. 대공포탄의 탄막을 뚫고 일본의 미쓰비시 Ki-51 급강하 뇌격기가 호주 해군의 기함인 1만3,450톤짜리 중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호의 함교 위 통신구조물에 내려 꽂혔다. 탑재한 대형 폭탄은 불발돼 함체는 큰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운동에너지만으로 사망 30명에 부상 20명이 발생했다. 계획에 의한 자살 공격, 이른바 가미카제(神風)가 시작된 순간이다. 가미카제의 첫 격침 기록은 24일, 1,120톤급 예인선이 가라앉았다. 이튿날에는 7,800톤짜리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로호가 격침됐다. 양측이 닷새 동안 모두 250만톤이 넘는 함정을 동원해 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꼽히는 '레히테만 해전'에서 일본은 완패했어도 자살공격으로 5척 격침에 23척 대파, 12척 파손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고무된 일본은 자살공격을 전선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종전까지 가미카제로 희생된 일본인은 3,812명(미국 자료)에서 1만4,009명(일본 자료). 연합국도 사망 4,907명, 부상 4,824명이라는 인적 손실을 입었다. 정규 항공모함이나 대형 전함 같은 주력함정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았으나 50척의 연합국 함정도 격침됐다. 일본은 왜 무모한 자살공격에 나섰을까. 철강생산 19배, 원유생산 160배로 상징되는 물자와 장비ㆍ경제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나온 광기의 발현이다. 막바지 발악은 역으로 종전을 앞당겼다. 패전이 확실해지자 '1억 국민 가미카제'를 외치는 일본에 상륙할 경우 최소한 미군 100만명이 희생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을 굴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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