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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은 천왕봉·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꼽힌다.
하지만 기자는 노고단 가는 길은 그저 평지나 다름없는 트레킹코스라고 생각했다. 노고단의 해발고도가 1,507m라고는 하나 산 아래에서부터 성삼재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는 까닭이다. 그래도 계절이 계절인지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취재를 떠나기 전날 산 좋아하는 후배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는데 걱정도 팔자"라는 면박이 돌아왔다. 그래서 기자는 느긋한 마음으로 구례로 내려왔다. 그러나 웬걸? 구례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은 정색을 하고 기자를 말렸다.
◇안면 바꾼 노고단="시암재까지는 가능할 거요." 화엄사와 산수유마을 사람들은 입을 맞춘 듯 대답했다. 그런데 시암재부터 성삼재까지는 책임을 못 지겠단다. 화엄사 앞 관광센터 직원은 "시암재까지는 제설작업이 웬만큼 돼 있지만 시암재에서 성삼재까지는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구간"이라고 했다.
화엄사 앞 숙소에서 잠을 자고 오전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스노체인을 차의 앞바퀴에 걸고 살금살금 지리산으로 향했다. 천은사에서 성삼재로 향하는 도로 입구에는 차단기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사륜구동차를 밀어 넣고 전진한 지 5분도 안 돼 눈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석한 눈길은 그런대로 헤쳐갈 만했다. 하지만 중간에 눈이 다져진 응달 두어 곳에서는 차가 휘청거렸다.
30분쯤 기다시피 운전을 한 끝에 시암재에 도착했다. 휴게소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시암재를 지나 성삼재로 진입하는 비탈은 산의 북쪽 사면이었다. 그동안 내린 눈이 쌓이고 다져진 비탈길은 '눈길은 이런 것'이라는 듯 기자를 조롱했다.
체인까지 감고 올라온 차를 버리고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시암재에서 성삼재까지면 눈길에서는 왕복 한 시간인데 잘못하면 일출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눈길에 차를 세워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인 듯한 4륜 구동 트럭이 멈추더니 기자를 말렸다. "우리들은 길이 익숙해 운전이 가능하지만 당신은 위험하니 차를 두고 가라"고 했다. "성삼재까지만이라도 태워달라"고 했더니 "공무용 차량이라서 태워줄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매정하게 떠나가 버렸다.
차를 세워 놓고 걷기 시작했다.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 길로 접어들자 발목은 눈 속으로 푹푹 빠져들었다. 내딛는 걸음도 힘들었지만 눈에서 발을 빼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속도는 나지 않는데 땀은 삐질삐질 흘렀다. 쭈그리고 앉아 아이젠을 착용한 다음 트럭의 바퀴 자국 위로 걸으니 한결 편했다.
편한 길 대신 가로지르는 길을 택해서 부지런히 걸은 지 한 시간 반 만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려 해는 이미 떠오르고 난 후였지만 노고단은 먹구름에 뒤덮여 어두웠고 강풍에 눈발까지 휘날렸다.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제단'이라는 뜻의 노고단은 원래 길상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봉우리다. 맑은 날에는 남해바다와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지리산의 명소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날 찾은 노고단은 시계가 20m 정도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온화하고 인자한 시어머니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앙칼지고 짜증스런 노파의 모습이 등산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 해 전 여름 운동화를 신고 한가하게 나들이 삼아 걸어올랐던 노고단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수유마을=노고단을 내려오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랗게 개어 있었다.
구례에 온 김에 산수유마을을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에 노랗게 세상을 뒤덮었던 꽃이 지고 가을에 빨갛게 결실을 보였던 열매 위에 눈을 덮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은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양으로 국내에서는 내로라는 산수유 산지다. 산동면의 산수유 생산량은 국내 총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산수유는 열매도 아름답지만 노란색 꽃은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진달래·개나리와 함께 명성이 높아 해마다 3월이면 구례군 전체가 산수유꽃축제로 흥청거린다. 층층나무과 낙엽교목인 산수유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수종 중의 하나다. 열매는 녹색으로 열리지만 가을 햇볕을 받으면서 붉게 익어 빛을 발한다.
산수유의 수확은 10월 이후 시작돼 11월 말까지 계속되는데 기자가 찾은 날 산수유마을의 거의 모든 나무에는 붉은 열매들이 온전히 달려 있었다.
기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곽영숙 해설사는 "돈이 되는 줄 알면서도 일손이 모자라 지금까지 열매를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날 내린 눈은 산수유 위에서 녹아버렸다. 그저 붉은색의 열매에 쭈글쭈글한 주름만이 새 봄을 기약하고 있었다. /구례=글·사진 우현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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