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을 끝내 이탈할 것이라는 공포가 커지는 가운데 전세계가 자국 환율 방어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오는 6월17일 그리스 재총선 이후 현재 1.25달러선인 유로화 값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본격적인 글로벌 환율전쟁의 새 막이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몸이 단 나라는 유로존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스위스다. 토마스 요르단 스위스중앙은행(SNB) 총재는 27일(현지시간) 자국 언론인 존탁스차이퉁에 "지난 몇주간 스위스프랑화의 절상압력이 거세지고 있다"며 "비상시 외화예금을 비롯한 자금 통제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스위스로 유입되는 글로벌 투기자금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SNB는 지난해 8월 유로당 프랑화 환율이 1.03프랑까지 폭락하자(프랑화 가치급등) 9월 전격적으로 환시장에 개입해 프랑화 값을 최고 1.20유로로 제한하는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면서 프랑화 절상을 결사 저지해왔다. 스페인 리스크가 불거진 지난 4월5일에는 뉴욕외환시장에서 프랑화 값이 장중 1.20유로선을 무너뜨린 적도 있지만 즉각 프랑화를 팔고 유로화는 매입해 방어선을 지켜낸 경험도 있다.
요르단 총재는 "프랑화를 비롯한 안전자산으로 글로벌 자금이 쏠리고 있다"면서도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환율 상한선을 지켜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프랑과 더불어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일본 엔화 방어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엔화 환율은 일본중앙은행(BOJ)의 잇단 환시개입에 힘입어 3월 중순 달러당 83.73엔까지 올랐지만(엔화 값 하락) 최근에는 79.66엔까지 떨어져 다시 한번 '엔고'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아즈미 준(安住淳) 일본 재무상 등 금융당국이 "엔화 투기흐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으며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연일 구두개입에 나서고 있지만 금리인하 같은 뾰족한 압박수단이 없다는 게 현실적인 부담이다.
환율전쟁(currency war)이란 용어를 최초로 만들며 자국 화폐인 헤알화 가치를 끌어내려온 브라질도 유럽 재정위기의 와중에 최근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브라질 중앙은행은 22일 21억9,000만달러어치의 통화파생상품을 매각해 달러를 팔아 치웠다. 세계경제가 침체를 보이는 상황에서 환율이 더 떨어질 경우 수입물가가 폭등해 국내 산업기반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푸투라증권의 안드레 페레이라 이사는 "브라질의 환율정책이 뒤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환시장이 급변할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미국의 대응에도 관심이 쏠릴 것으로 전망된다. 미 재무부는 25일 '주요 교역국 통화정책'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원화가치를 낮추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중국이 환율조작국은 아니지만 위안화 가치는 여전히 매우 저평가돼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달러 값이 오를 경우 중국 등 신흥국도 이에 걸맞은 화폐 가치 절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그리스가 설령 유로존에 잔류하더라도 당분간 유로화 절하 랠리가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루카스 파파데모스 전 그리스 총리는 "그리스 공공재정이 총선 전인 6월 초에 말라붙어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험을 키울 것"이라고 이날 경고했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유로존 2위 경제대국인 프랑스의 그리스 익스포저(위험 노출액)는 390억달러에 달해 앞으로도 유로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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