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건 뒤로 묶은 머리카락뿐이었다. 세계랭킹 1위와 3위의 2타차 추격 속에 마지막 날 같은 조 동반 플레이. 미국 언론에서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이라고 불리는 세계 2위 박인비(27·KB금융그룹)에게는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다. 2타 차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1~4라운드 내내 선두)을 확정하고 나서야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8일 싱가포르 센토사GC 세라퐁 코스(파72·6,600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HSBC 위민스 챔피언스 최종 4라운드. 전날까지 13언더파를 기록, 세계 1위 리디아 고와 세계 3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에 2타 앞선 단독 선두로 출발한 박인비는 이날도 보기 없는 무결점 플레이를 펼쳤다. 버디 2개로 최종합계 15언더파. 이렇다 할 위기도 없었다. 2타를 줄인 리디아 고는 13언더파 단독 2위, 미국의 자존심 루이스는 이븐파에 그쳐 11언더파 단독 3위에 만족해야 했다.
'골프여제' 박인비는 나흘간 선두를 지켰을 뿐 아니라 총 72홀 동안 단 1개의 보기도 범하지 않았다. 지난주 혼다 타일랜드 최종 라운드까지 합하면 90홀 연속 노 보기다. 이번 대회에서 15개의 버디와 57개의 파로 시즌 첫 승이자 LPGA 투어 통산 13승째를 올린 박인비는 우승 상금 21만달러(약 2억3,000만원)를 챙겼다. 지난해 11월 푸본 타이완 챔피언십 이후 4개월 만에 드는 트로피였다. 2013년 메이저 대회 3승을 포함해 6승, 지난해 메이저 1승 등 3승을 쌓은 박인비는 일찌감치 시즌 첫 승을 신고하면서 2013년 이상의 활약을 예고했다. 또 리디아 고와의 포인트 격차를 줄이며 세계 1위 탈환에도 가속도를 냈다.
경기 후 박인비는 "지난 7년 동안 이 대회 성적이 좋지 못했는데 우승으로 마무리해 기쁘다"며 "노 보기 우승은 올해 활약의 좋은 신호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박건규씨)와의 내기를 한 사연도 털어놓았다. 박인비는 "이번 대회 코스는 무척 어려워서 버디를 잡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내기를 했는데 내가 버디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내게 500달러를 주고 내가 보기를 하면 아버지에게 1,000달러를 주는 것이었다"고 소개하며 "버디만 15개를 했다. 7,500달러를 보너스로 받게 됐다"며 웃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동생까지 온 가족이 응원하러 왔는데 그 앞에서 우승해 더 기쁘다"고 밝혔다.
한국 선수들은 LPGA 올 시즌 전체 5개 대회에서 4승을 쓸어담는 초강세를 이어갔다. 뉴질랜드동포인 리디아 고의 호주 여자오픈 우승까지 포함하면 한국계 선수가 5개 대회 우승컵을 싹쓸이한 셈이다. 지난해 마지막 4개 대회에서도 한국계 선수가 우승을 휩쓸었으니 '코리안 시스터스'는 9연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날 박인비는 6번홀까지는 버디 없이 파 행진을 벌였다. 이 사이 리디아 고가 버디 2개를 잡아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호주 여자오픈 우승 뒤 혼다 타일랜드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그 기간 유럽 투어 뉴질랜드 여자오픈에 출전해 우승한 리디아 고는 3주 연속 프로 대회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리디아 고의 상승세에 단독 선두에서 내려온 박인비는 그러나 7번홀(파5)에서 4라운드 첫 버디를 잡으며 단독 선두를 되찾았다. 후반 들어서 박인비는 역전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았다. 11번홀(파4) 5m 버디로 리디아 고를 2타 차로 따돌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 '여제'의 모습에 추격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디아 고는 12번홀(파5) 3온 3퍼트로 1타를 잃었고 13번홀(파4)에서도 보기를 범해 박인비와 4타 차로 벌어졌다. 15번홀(파4)과 18번홀(파5)에서 1타씩을 줄여 다시 2타 차로 좁혔지만 박인비는 남은 홀을 모두 파로 막아 여유 있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편 유소연(25·하나금융그룹)이 10언더파로 공동 4위에 올랐고 LPGA 투어 공식 데뷔 후 두 번째 대회에 나선 김효주(20·롯데)는 이날 5타를 줄여 8언더파 공동 8위를 기록했다. 지난주 데뷔전인 혼다 타일랜드에서 공동 23위에 그쳤던 김효주는 한 주 만에 톱10에 진입하며 새 무대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일희(27·볼빅)도 공동 8위.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신인왕 백규정(20·CJ오쇼핑)은 4오버파 공동 51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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