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전기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던 소년. 그러나 그 시절 전남 해남 땅끝마을의 시골뜨기가 품었던 열정만큼은 뜨거웠고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철 지난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을 도둑처럼 올렸다 내리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던 국내 공연계에 처음으로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뮤지컬 '더 라이프'를 들여온 사람, 연극 '엄마를 부탁해' 재공연을 위해 연극 공연으론 유례없던 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두 달간 공연을 밀어붙인 사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일부러 걷는 뮤지컬 제작자 박명성(50ㆍ사진) 신시컴퍼니 대표다. '촌놈' 박 대표가 품었던 열정은 신시컴퍼니의 상징적 색깔인 빨간색만큼이나 강렬하고 뜨거웠다. 특출 난 재능도,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도 없었지만 꿈을 믿었고 외길 인생을 묵묵히 걸었다. 출혈이 컸던 제작 실패, 위암 초기 진단과 한 차례 수술 등 크고 작은 시련을 마주했지만 뮤지컬 '렌트' '맘마미아' '아이다' 등 브로드웨이 화제작들의 한국판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며 국내 공연계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된 지금도 그의 '무(모)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할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고스트'의 라이선스를 아시아 최초로 따내 11월 국내 무대에 올린다. 제작비만 120억원에 달하는 대작이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는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을 창작 뮤지컬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양재동 신시컴퍼니 사옥에서 박 대표를 만나 30여년 공연계에 쏟아부은 그의 열정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껴봤다.
◇ 땅끝마을 '촌놈', 공연계 '미다스의 손'이 되기까지
전남 해남은 박 대표가 나고 자란 곳이다. 박 대표 스스로 '깡촌'이라 표현할 정도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 배도 타고 갯벌서 놀았던 기억이 정서적 곳간을 풍요롭게 채워준 것 같다"고 회고했다. 박 대표의 유년 시절 꿈은 '배우'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로 연극판에서 단역배우 생활을 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고 김상열 선생이 창단한 극단 '신시'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지만 정작 배우로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대에 3분 이상 머물렀던 적이 없었다. "축축한 지하 소극장에 하루 종일 있다 이른 아침 햇볕에 몸을 말리려 올라와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과 정장을 갖춰 입고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견줘보며 불현듯 미래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는 그는 배우의 꿈을 접고 다시금 조연출 생활을 시작했다. 공연 전단지 작업부터 음향ㆍ무대ㆍ조명 등 온갖 허드렛일을 경험했다.
이를 자양분 삼아 박 대표는 연출ㆍ기획으로 방향을 틀었고 결국 마지막에 그를 붙잡은 건 프로듀서 일이었다. 1998년 저작권 개념 없이 해외 작품을 베껴 공연하던 당시 국내 공연 관행에서 벗어나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라이프를 무대에 올렸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현지와 라이선스 계약을 해 국내 무대로 해외 흥행 대작을 공수해왔다. 최고의 흥행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2007년, 그는 새 도전을 시작한다. 열일곱 유년 시절 박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연극 '산불'의 뮤지컬 버전 '댄싱 섀도우'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7년여의 시간을 공들여 만들었지만 결과는 씁쓸했다. 50억원의 제작비를 쏟았지만 25억원이 넘는 빚만 고스란히 떠안았다. 쓰라린 지난날조차도 박 대표는 "실패를 통해 외려 맷집을 키웠다"며 웃어넘긴다.
◇ 무모한 도전?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 짜릿하다
박 대표가 이끄는 신시컴퍼니의 대표작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뮤지컬 맘마미아다. 이는 중년 관객을 새롭게 공연장으로 끌어들여 뮤지컬 대중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대표 작품이다. 늘 가지 않은 길을 일부러 걷는 박 대표는 올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오는 11월 아시아 최초로 라이선스를 얻은 뮤지컬 고스트를 무대에 올린다. '매직컬(마술을 뜻하는 매직(magic)과 뮤지컬의 합성어)'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한 무대 메커니즘에 방점을 찍었다. 박 대표의 호기로운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는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을 창작 뮤지컬로 옮겨온다. 70억원가량의 제작비가 들었고 8월 1차 대본이 완성된다. "내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한국의 뮤지컬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킬러 콘텐츠로 키우고 싶다"는 게 박 대표의 포부다. "스태프들의 눈높이와 수준은 물론 배우 역량도 튼튼한 지금 이제 한국도 한국만의, 한국의 이야기로 대표 창작 뮤지컬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대표는 "영국에서 공수한 오토메이션 무대 시스템으로 화려한 무대 전환을 선보이며 다소 신파적일 것 같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겠다"고 했다.
"대다수 공연 제작자들이 '창작 뮤지컬=실패' 공식을 기저에 깔고 작품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단순히 '나 창작 뮤지컬 한 편 했어' 정도로 자기 위안을 삼고 끝나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형 라이선스 공연 몇 개를 통해 회전문식으로 관객에게 무대를 선보이기보다 우리만의 글로벌 한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 낼 시기입니다. 마지막 작품이라는 일념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 대표는 이제 더 이상 쇼적이고 오락적인 창작 뮤지컬만으로는 공연 시장 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의 사례처럼 진중한 스토리에 세련된 무대 메커니즘을 입히는 등 실험적이고 다양한 도전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관객층을 발굴하고 한국만이 지닌 매력적인 킬러 콘텐츠도 생겨날 수 있는 겁니다."
◇ 사람(人)이 재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프로듀서의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그들 각자의 꿈을 지지해주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흐트러진 마음을 곧추세워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기획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자 사람과의 소통이다."
박 대표의 두 번째 책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의 한 구절이다. 공연 외길 인생에 있어 그가 가장 우선으로 두는 부분은 사람(人)이다. 일의 능률을 위해서는 중간 중간 직원들을 향한 박 대표의 직언이 필요하겠지만 그는 "기다림이 곧 사랑"이라 믿는다.
"최고경영자(CEO)는 기다림의 연속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일일이 방법을 알려주면 일을 끝내는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고 방법을 터득할 때까지 스태프(직원)를 재촉하진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 알고 성장해야 이 분야에 오래도록 남는 붙박이가 된다는 게 지론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곧 재산이 되기도 하고요."
박 대표가 후학 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명지대 영화ㆍ뮤지컬학부 전임 부교수로 학생을 지도하고 있는 박 대표는 "후에 아카데미나 스튜디오를 근사하게 지어 연극ㆍ뮤지컬 등 공연계 인재 양성에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다면 한다. 5년 뒤 꼭 후학 양성 기관을 만들겠다"고 말한 박 대표의 바람이 실현되길, 그래서 공연계 제2르네상스를 이끌 알짜배기 인재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해본다.
He is…
▲ 1963년 전남 해남 ▲ 1982년 극단 동인극장 입단 ▲ 1985년 2월 서울예술대 무용과 졸업 ▲ 2003년 2월 단국대 연극영화과 편입 졸업 ▲ 2008년 8월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뮤지컬제작과정 졸업 ▲ 1999~2009년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 ▲ 2007~2009년 서울연극협회회장
사옥 1층에 무료 전시공간… "예술인 소통장소 됐으면" 김민정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