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부끄럽다. 3남매를 둔 아버지로서, 아니 그냥 어른으로서 죄인이다. 말을 아끼고 삼가야 할 때인데 현안을 다뤄야 하는 상황도 곤혹스럽다. 사고 직후 원내수석으로서 상임위 소집은 물론 자료 요구조차 자제시켰다. 공무원들이 구조지원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도부는 현장방문을 금했다. 행여 인명구조에 방해될까, 보고받을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기적을 바라는 지구촌, 교황과 각국 정상들의 위로 메시지, 비판적인 외신보도들을 접하며 선진화와 국격 운운하던 지도자들이 떠올랐다. 속죄하고 자성하는 마음으로 쓴다.
인재(人災)로 인한 불행과 불안, 대책과 불신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 악무한적 단진동의 고리를 끊을 수 없나.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 교수의 경고처럼 성찰과 점검이 필요한 때다. 혹자는 '빨리빨리' 경제성장의 이면에 자리 잡은 '대충대충' 사회의식을 지적한다. 공감한다. 우리 사회는 졸속 근대화와 천민 산업화가 빚어낸 전통과 현대의 복합 위험사회다. 속보경쟁인지 오보경쟁인지 모를 언론의 선정적 행태도 마찬가지다. 안전의 문헌적 정의는 '개인과 사회의 건강과 안녕(well-being)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위험요인과 상황이 통제되고 있는 상태'다. 과연 국민은 안녕하고 사회는 건강한가.
학업성취도는 세계 1위인데 학업만족도는 꼴찌인 교육현실, 수영과 생존훈련을 가르치는 유럽과 달리 심야 학원버스에 올라야 하는 10대들의 삶, 그저 어른들 시키는 대로 시험문제 풀고, 가만히 있어라 말 잘 듣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프다. 출산율은 10년째 OECD 꼴찌, 희생된 학생들 대부분이 독자다. 노인빈곤율은 47.2%로 세계 1위, 어르신 절반이 가난과 싸우고 노인자살률도 압도적 수치로 세계 1위의 불명예다. 소득불평등도 심해 노인층 지니계수가 0.411에 달한다. 0.5에 근접하면 역사적으로 폭동이나 정변이 발생했다. 이제는 사회적 가치의 중심을 인간과 행복에 맞출 때도 됐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말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지금 온 국민이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묻고 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논리를 빌리면 백성들이 낸 조세만큼 통치자로부터 민생안전을 보답받고 있는가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오늘은 홉스가 말한 '국가를 통한 안전'보다 로크의 '국가로부터의 안전'을 찾기 바쁘다. 대한민국헌법 제34조 제6항은 가리킨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국민안전을 위한 재원과 제도, 의식과 교육 등은 개인비용이 아니라 공공투자로 대응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하고 반성 없는 역사에 미래는 없다. 역사의 교훈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 투쟁이다. 이번 참사로 희생되신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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