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도화서 화원이었던 심전 안중식의 제자이자 한국화단을 이끌었던 근대 동양화 6대가 중 으뜸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1897~1972). 서울 서촌에 살던 그는 말년에 안채를 새로 손봐줬던 같은 동네 목장(木匠·목수)의 막내아들이 곧잘 그림을 그린다고 해 어느 날 기별 없이 그 집을 찾았다. 올해 열여섯이라는 아이가 눈이 맑고 영특해 별 말 없이 집 한편에 있던 초배지에 몽당붓으로 난초 한 점을 그려준 청전은 "그대로 한번 그려 보거라" 하고는 돌아갔다. 두 달 뒤 사내아이는 채본이 시커멓게 되도록 연습한 그림을 들고 청전의 집을 찾아왔는데 그는 도리어 야단을 쳤다. 알고 보니 모사할 종이가 모자라 청전이 줬던 채본 위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불호령을 들었던 사내아이는 청전의 '청연산방'에 정식 제자로, 막내 도제로 들어갔다. 청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년여 동안 문하에 두고 가르쳤던 제자 석철주(64·추계예대 교수·사진)다. 당시 그는 '사물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보는 법'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법', 필요하지 않은 것은 넣지도 말아야 한다는 '비움의 미학'을 배웠다.석 교수는 이렇게 동양화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스승에게 배운 것은 먹·격·준법뿐이 아니었다. 정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동양화는 먹을 사용하는 재료의 한계가 아니라 정신세계에 근간이 있으므로 다양한 재료로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을 열었고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인 먹과 서양화 안료인 아크릴을 혼용하며 파격적인 색감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했다. 5년 만에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를 남양주 서호미술관에서 만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여름에 태어난 목수의 막내아들은 야구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꼼짝없이 집에 누운 아들이 안쓰러워 아버지는 이웃에 살던 청전에게 어렵게 부탁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까다로운 청전이 내치지 않고 가르쳤던 것을 보면 분명 재주는 있었다.
그는 현역 화가로 활동을 펼쳐가던 27세 때 돌연 대학에 들어갔다. 보수적인 전통 화단의 틀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회화언어'를 탐색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 막내아들에게 배고픈 화가의 길은 험난했다. 20~30대에는 손대본 직업만 스무 가지가 넘는다. 여름이면 해수욕장 안전요원을 하면서 짬짬이 수박을 팔았다. 겨울이면 군밤과 군고구마를 팔아 돈을 모았다.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도 불러봤다.
그나마 좋았던 일은 관광과 등산 가이드였다. 벌이도 있는데다 마음껏 산수(山水)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기반이 튼실하지 못하다는 변명으로 결혼이 늦어져 마흔에야 장가를 들었다. 그 즈음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해 1990년 모교인 추계예대 교수가 됐고 그해 제9회 미술기자상을 받았다.
석 교수는 청전을 만난 지 40년 되던 2005년 '신(新) 몽유도원도'를 화단에 선보였다. 동서양을 섭렵하고 수묵과 채색을 넘나들어 득도하듯 이룬 그만의 고유 화풍이었다.
"겹겹을 이룬 준봉들이나 희뿌연 구름과 안개에 휩싸인 풍경은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전통 화풍입니다만 저의 '신 몽유도원도'는 먹이 아니라 아크릴로 그린 것이죠. 서양 재료를 사용하지만 한국화의 스밈과 번짐·비침의 효과는 그대로입니다."
그리는 행위가 평면 위에 칠을 더하는 것이라면 그는 지움으로써 형상을 만들어낸다.
캔버스 위에 하얀색이나 검정색으로 바탕칠을 한 다음 그 위에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을 입힌다. 덧칠이 마르기 전에 물에 적신 붓으로 형상을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마른 붓으로 또 붓질한다. 붓질을 따라 어렴풋이 형상이 흔들린다. 지워짐 속에서 놀랍게도 형태가 드러난다. 이것은 물감이 아닌 맹물로 그린 그림이며 마르기 전의 물과 붓질의 순간적 결합으로 태어난 형상이라 우연성이 도드라지면서 예민하다. 한국화 특유의 습기 머금은 대기의 풍광이나 꿈길을 걷는 듯한 아련함도 고스란히 구현해냈다.
"사람에 따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오래 묵혀 곰삭은 깊은 맛에 가깝습니다. 안에서부터 색이 배어 나오게끔 끄집어내고 긁어서 밑 색이 새 색으로 나옵니다. 긁힌 상처 아래로 새 살이 돋아나오듯, 자연의 기억에서 치유의 힘을 끌어 올리죠.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림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곳으로도 언제든 보내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산수화죠."
사실은 작가 자신이 겪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신 몽유도원도'를 탄생시켰다.
"20~30대 때 너무 많은 일들을 했고 특히 등산과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산행을 무리하게 했나 봅니다. 게다가 서양화가처럼 이젤 위에 화판을 올리고 의자에 앉아 그리는 게 아니라 바닥에 쭈그린 채 작업하는 탓에 양쪽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고 하더라고요. 2003년에 연골 수술 후 누워 있으려니 산에 못 가게 되니까 더욱 간절히 산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풍경, 내 머릿속에 남은 그 풍경을 그려야겠다 생각했죠.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같은 맥락이었다고 봅니다. 가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마음속 그곳, 머릿속 이상향을 펼쳐놓은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 작품에 신(新) 자를 붙여 지금껏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석 교수의 산은 보는 사람에 따라 '나의 산'이 된다. 직접 등산해 오른 풍경일 수도, 비행기를 타고 지나치며 본 산 일수도, 어젯밤 꿈에 본 산일수도 있다.
소라껍질에 귀를 기울이면 각자의 경험에 따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고동 소리와 바닷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닷가에서 주운 진주 조개껍질도 각자의 심상을 반영해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얀빛을 번갈아 뿜어낸다. 석 교수의 '신 몽유도원도'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라면 홀로그램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겠다. 작품 앞에 선 위치에 따라, 빛의 방향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햇빛의 양에 따라 색채는 순간순간 변한다. 신기할 정도다. 실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서양식 개념인 '풍경화'는 보이는 그 대상을 표현하는 것인 반면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을 그리되 작가의 생각과 보는 마음을 통해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요즘 '산수화가입네' 하는 작가들 중에는 재료만 동양적이지 풍경을 그리듯 사실적인 한계를 보이는 이들도 종종 보입니다. 제 그림을 '동양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평하는데 동양의 전통 산수화 개념에 어떻게 현대적 해석을 더하고 풀어갈지가 핵심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있는 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개념으로 풀어야지요."
색채 또한 파격적이다. 수묵의 담담함과는 거리가 먼 야한 핑크색 산수화는 조금 놀랍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야하다고요? 몽유도원도의 '도(桃)'자가 복숭아라 복숭아색으로 그려봤습니다. 원색적인 것을 강렬한 그림이라고 하지만 시각적 강렬함이 심적 강렬함은 아니에요. 대나무가 강하지만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들만큼 강하지는 않거든요. 제가 쓰는 색은 감각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비껴가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정신세계가 있어야만 오래오래 싫증 나지 않는 그림이 되지요."
스승 청전은 암 투병 중에도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정신을 가다듬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 모습도 보고 배웠다. 그래서 성실하다. 집·학교·작업실만 오가는 삼각 트라이앵글 삶. 그는 어제오늘 그러했듯 내일도 또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꿈도, 그 누군가의 이루지 못한 꿈도 모두 담아.
모기장서 본 풍경처럼 픽셀기법으로 막 너머의 세상 은유적 표현 ■ 신작 '신 몽유도원도'는 그림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마치 망을 덧씌운 듯 픽셀 효과가 가미돼 있다. 이를 두고 작가는 "비유하자면 모기장을 통해 본 바깥세상 같지 않느냐"고 되물으며 "맑고 선명한 풍경이 아니라 막을 통해 그 너머로 조망하는 또 다른 세상을 은유한다"고 덧붙였다. 전작들이 내면의 세계를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면 신작은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운 구상적 산수화인 동시에 분위기는 더욱 아련하다. 사의적(寫意的)이던 것이 사생(寫生)에 가깝게, 즉 생각과 마음에 기반했던 그림이 실제 산을 다니며 스케치한 자연 풍광을 토대로 더욱 친숙하게 바뀌었다. 보라와 분홍빛이 감도는 그림을 두고 혹자는 올봄 갔던 진달래 축제가 한창이던 산이라 했고 또 다른 이는 지난겨울의 설경이 생각난다 했다. 두 폭으로 나눠 그린 대형 작품은 세로 193㎝에 가로는 5m가 훨씬 넘는데 키보다 더 큰 화판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그린 작품은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계훈 미술평론가는 석철주의 신작을 두고 "초선명성이 디지털 기기의 경쟁력 가운데 하나인 것을 생각하면 점차 몽롱하고 희미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시대 역행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선명성과 조금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숨 막히는 현대 생활의 긴장감을 보상하는 균형추"라고 평했다. 이어 "자연과 그 자연을 관조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아날로그적 접근을 제시하는 시각예술에서의 새로운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남양주시 북한강 옆에 자리한 서호미술관과 작품들은 특히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그림과 자연의 혼연일체를 보여준다. 워낙 오묘한 분위기의 그림이라 도록이나 이미지만으로는 그 감성을 느낄 수 없으니 직접 미술관에서 봐달라는 게 작가의 당부다. |
He is… |
/남양주=글·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