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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분열 끝내고 통일했지만 북부동맹 분리독립 주장 등 140년 지난 지금도 화합은 먼길
로마 베네치아 광장의 기념관엔 '하나의 伊' 만들려는 노력 오롯이…
현대의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한 것은 지난 1871년으로 주요 유럽국가에 비해 한참 늦다. 이탈리아는 지역 색깔이 짙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정도 등 지역별 차이도 여전하다. 현대 이탈리아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고대 로마제국을 기원으로 한 단일국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민족이 섞였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로마 황제가 퇴위된 후 이탈리아는 곧 각 민족 간의 쟁탈전에 휩쓸렸다. 고트족·반달족 등 게르만계 부족을 거쳐 이후에는 프랑스·독일·노르만·스페인·아랍 등의 침입을 받았다. 동시에 수십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가 1,000년 이상 이어졌다. 14세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밀라노공국·피렌체공화국·베네치아공화국·나폴리왕국·교황령 등 주요 5개 국가로 정착된다. 하지만 서로 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여기에 외국의 간섭까지 섞여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군주는 여우의 꾀와 사자의 용맹을 가져야 한다"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을 피력할 만했다. 통일은 19세기 후반에야 이뤄진다. 다만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해 당시로서는 신생국인 피에몬테왕국이 주도하면서 다른 지역과의 질적 통합이 불충분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탈리아 내부 모순으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 통일영웅 가리발디=로마 시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는 테베레강 서쪽 건너편이라는 뜻의 트레스테베레 지역의 자니콜로 언덕이 있다. 여기 가리발디의 기마 동상이 서 있고 '가리발디 광장'이라고 불린다. 광장에 서면 로마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선명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포로 로마노 유적이 선명하다. 교회들의 돔 지붕과 16~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가리발디는 로마 시내에서 가장 좋은 곳에 동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역사 속에서 비중도 클 듯하다. 하지만 '말을 탄 채 큰 칼 옆에 차고' 있는 그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다. 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년)는 평생을 이탈리아 통일과 혁명에 바친 인물이다. '통일 이탈리아'를 이루는 데 최대의 공을 세웠다.
우리가 쉽게 '이탈리아'라고 부르지만 1861년 통일을 이루기 전 이 이름은 문학작품이나 낭만적인 정치가들의 공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5세기 말 로마제국(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작은 국가들로 분열됐고 이런 체제는 1,400여년이나 지속됐다.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은 것은 프랑스혁명의 영향이다. '민족'이라는 이상이 부각되면서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 것이다.
통일운동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공화국·연방주의를 통한 통일 방안과 상대적인 강대국에 의한 무력통일 방안이다. 공화국·연방주의에서는 마치니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있었고 힘에 의한 통일에는 피에몬테왕국의 수상 카보우르가 있었다. 결국은 피에몬테의 군사력과 외교력에 의해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다만 피에몬테에 의한 통일은 일단 로마 이북의 북쪽에 그친다. 남부의 통일은 가리발디에 의해서 달성된다. 가리발디가 의용군을 이끌고 나폴리왕국을 정복하고 이를 피에몬테왕국에 헌납하면서 드디어 남북 이탈리아가 합쳐지기 때문이다. 1861년의 일이다. 1871년 교황령으로 있던 로마까지 합병하면서 완전한 이탈리아 통일이 이뤄진다.
◇통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만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로마의 중심에 베네치아 광장이 있다. 로마시민들이 시내에 간다고 할 경우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다. 정면에 서 있는 하얀색 건물이 1911년 완공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다. 그는 이탈리아가 통일을 달성한 당시의 피에몬테왕국 국왕이었던 사람이다.
로마의 중심인 베네치아 광장에, 그것도 고대 로마의 핵심인 캄피돌리오 언덕을 깎아내면서 저런 거대한 기념관을 만든 것에는 통일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강박관념이 있다.
1,400여년 동안 나뉘어 있던 나라가 갑자기 통일이 됐다. 지식인들 외에 일반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통일은 됐다. 하지만 곧바로 공업화가 앞선 북부와 여전히 농업지대로 가난했던 남부와의 지역 차이가 발생했다. 그리고 각 지역도 순순히 피에몬테라는 '정복자'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거대한 사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인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거대한 기념관 건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외국인에게 이 기념관만큼 인기가 없는 곳도 없다. 고대 로마 문명도 아니고 중세·근대 유적도 아닌 덩치 큰 '웨딩케이크' 같은 건물이 시내 중심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념관 앞에 있는 '영원의 불꽃'은 살펴볼 이유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24시간 타오르는 불꽃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시작된, 이탈리아가 원조다.
◇통일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지도상에서 지역이 합쳐졌다고 해서 모두 통일인 것은 아니다. '통일 이탈리아'를 선포한 지 1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히려 최근에는 '북부동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공개적으로 북부의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나서는 형편이다. 남부지역의 빈곤 상태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우리가 '마피아'라고 부르는 조직폭력단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여기에 '국가 안의 국가'로 면세 등 여러 특권을 가진 가톨릭국가(바티칸)까지 있어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
로마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지저분함에 깜짝 놀란다. 건물마다 그려져 있는 낙서에 곳곳의 쓰레기까지 걸핏하면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앰뷸런스나 경찰차에 곤란한 상황을 자주 만난다. 시내의 도로는 악몽 자체다. 길도 좁은데다 제대로 방향을 찾기도 어렵다. '아피아 가도'를 만든 고대 로마제국의 후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전통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그리고 르네상스를 포함하는 중세와 근대의 무게, 현대의 이익집단들이 적극적인 변화를 방해하는 것이다. 로마만 한 대도시가 지하철이 2개 노선밖에 없는데 이는 유적 때문에 터널의 굴착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리발디의 고향은 니스다. 프랑스의 유명한 휴양지다. 그러면 어떻게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사람일까. 니스는 과거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영토분쟁지였다. 가리발디가 태어났을 때인 1807년에는 프랑스혁명 후 혁명정부가 합병한 상태였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 이탈리아가 되찾았다. 하지만 피에몬테의 수상이던 카보우르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프랑스의 원조를 얻기 위해 1860년 프랑스에 넘겨버렸다. 이탈리아의 통일영웅 가리발디의 고향이 완전히 프랑스가 돼버린 것이다. 그의 동상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파시즘도 통일후 내부 모순의 산물 1차대전 참전후 전후처리서 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