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붓끝에 놀아나는 이 세상, 그 속에서 나는 미친 광대였노라."(연산)
피 토하며 죽은 생모를 그리다 복수와 광기로 치달은 사람, 역사가 '악명 높은 폭군'으로 기억하는 조선의 10대 국왕 연산군이 무대에서 부활했다. 폭군도 미치광이도 아닌 인간으로, 사무치는 그리움과 두려움에 몸부림친 한 명의 '문제적 인간'으로 말이다.
지난 1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사진)'은 역사 속 인물 앞에 붙은 수식어와 '선악', '옳고 그름'의 역사적 평가를 떼어 내고 알몸으로서의 인간 그 자체에 조명을 들이댄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신하들, 그리고 그들의 무기가 되는 성왕의 그림자까지. 나약한 인간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중심으로 점차 폭주하는 광기를 그려간다.
작품에 녹아 있는 '굿'의 형식과 묘한 에너지의 판소리는 연극을 또 다른 굿이자 제의처럼 만든다. 작·연출가인 이윤택은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왔듯 폐비 윤씨를 위한 굿과 접신·혼령 등 샤머니즘적인 소재를 이용해 독특한 무대 색깔을 빚어냈다. 장녹수를 연기하는 이자람이 음악감독·작창을 맡아 만든 애절한 노래와 현대무용을 연상케 하는 연산의 격정적인 안무가 한데 어우러지며 애달픔과 분노, 광기를 형상화한다.
감각적인 무대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무대는 울창한 대숲 안에 썩고 갈라진 대들보가 중심을 잃고 누워 있는 형상이다. 경사진 바닥과 그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용상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비극적이다. 대숲의 다양한 길을 통해 등장하는 인물들과 때론 신비롭고 때론 기괴한 조명이 더해지며 작품 전반의 우울한 분위기를 북돋운다.
무거운 내용이지만, 연산과 12명의 대신이 대비의 상(喪)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나 제 목숨 부지하기 위해 눈치 보는 관료 등을 재치 있게 표현하며 극의 분위기를 적절히 환기했다. 공연 시간이 160분으로 다소 길지만, 연산 역의 백석광, 장녹수와 폐비 윤씨 혼령 1인 2역을 한 이자람, 충신 처선 역의 이승헌 등 모든 배우가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이야기의 긴장감을 끝까지 가져갔다.
이 작품은 과거의 웅덩이에 빠져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지도자와 그 밑에서 처세술과 세 치 혀로 대를 이어 배를 불린 관료를 보여준다. 광기가 극에 달한 왕을 향해 처선은 이렇게 외친다. "소인 사내구실 못하는 거 알면서 왜 임금 구실 못하고 있는 건 모르시오." 그는 간신 숭재에게도 말한다. "닥쳐라 이 백정 놈아, 멀쩡한 임금을 백정으로 만들어 놓았구나." 시대를 뛰어넘는 거울이요 강렬한 메시지인 연극. 무대 위에 펼쳐진 비극과 충신의 절규를 통해 그 힘을 새삼 깨닫는다. 7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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