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통합 3기 국민은행장 선출을 앞두고 현직 강정원 행장과 2인자 김기홍 수석부행장이 맞붙었다. 둘 다 정통 KB 출신이 아닌 외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쟁은 치열했고 결과적으로 강 행장이 연임에 성공했지만 조직에는 상처가 남았다. 1인자가 연임을 꿈꾸는 상황에서 2인자가 공개적으로 도전을 한 모양새다 보니 KB의 고질적인 '줄 대기' 문화가 재연됐고 후유증도 상당했다. 당시 가까스로 연임에 성공한 강 행장은 김 수석부행장을 사실상 경질하고 강력한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KB 내부에서 1인자와 2인자의 갈등은 이후에도 꾸준히 반복됐다. 어윤대 회장과 임영록 사장,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 등의 갈등은 지난해 금융계를 뒤흔든 'KB 사태'의 싹을 키웠다. 1인자의 연임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이사회가 독립적이지 않은데다 정치권과 금융당국 등의 외압까지 꾸준히 들어오니 KB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반면 김승유 회장, 라응찬 회장이 장기 집권한 하나나 신한의 경우 안정된 지배구조를 정착시켰다.
27일 발표될 KB의 지배구조 개선안에 차기 최고경영자(CEO) 선출시 현직 회장에게 우선권을 주는 내용이 들어간 것은 이 같은 1·2인자 갈등과 관련한 KB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 차기 CEO 선출 과정에서 현직 회장과 내외부의 후보군이 대립하면서 갈등이 불거지고 외압에 약해지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현직 회장이 임기 전 연임 의사를 밝히면 이사회가 먼저 단독 후보로 현직 회장의 경영능력과 그간의 성과를 평가해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KB 이사회는 다만 현직 회장의 연임 여부를 결정할 때 다른 내외부의 후보들을 비공개로 비교하는 절충안을 선택할지, 아니면 회장의 경영능력만 가지고 판단할지 최종적으로 조율하고 있다.
취지로만 본다면 이 같은 시스템은 선진적이다. 강력한 이사회가 구축된 미국의 씨티은행·웰스파고·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이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이미 운영하고 있다. 한동우 신한 회장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직 회장의 연임 의사가 확실한 상황이라면 회장 선출 과정은 KB처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일부 후보를 들러리로 세우는 방식이다. 최근 김정태 회장이 연임한 하나금융 회장 선출 과정도 사실상 '무늬만' 회추위(회장후보추천위원회)로 이뤄졌다. 이런 회추위는 후보들의 질을 떨어트려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제대로 된 경쟁자가 공모하기 힘들게 한다.
하지만 현직 회장의 연임 여부를 이사회가 먼저 판단할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회장의 경영능력이 모자란다고 판단, 이사회가 교체를 확정한다면 내부에서 2인자가 나서도 잡음이 없고, 외부에서도 가능성을 노리고 능력 있는 후보군이 등장할 수 있다. 이사회만 중심을 잡고 있으면 외압도 차단할 수 있다. KB의 지배구조 개편안에는 이를 통해 KB의 고질적 갈등 구도를 탈피하겠다는 윤종규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지배구조를 구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이사회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KB의 이번 지배구조 개편안을 현직 회장의 연임 욕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사회의 독립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장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면 회장 선출 과정에서 이사회는 연임의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거수기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KB가 이번에 마련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독립된 이사회를 만들 실질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현직 회장을 단수로 추천해 연임 여부를 결정할 때 외부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KB는 주인이 없는 회사다 보니 지금까지 이사회가 회장과 결탁, 막강한 내부 권력화된 측면이 있었다"며 "내부 권력화가 아니라 회장의 자질을 직접 판단하고 생사여탈권을 쥐는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지배구조 개편이 성공할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에 KB가 새로 선임한 사외이사들의 면면이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KB의 새로운 시도에 기대를 걸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KB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번에 KB가 이사로 선임한 최영휘 전 신한금융 사장이나 이병남 LG인하원 원장, 김유니스 교수 등의 면면을 보면 기본적으로 지주 회장한테 휘둘릴 사람들은 아니다"라며 "회장의 권력욕이 아닌 KB의 본질적 변화라는 맥락으로 사안을 바라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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