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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23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골목. 이른 점심을 먹고 ○○정공 공장으로 돌아온 A사장은 고장 난 장비를 수리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 기계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내 손으로 만든 소방기계라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기기였다.
잠깐 방심하는 순간 갑자기 기계 상단을 받치고 있던 지지대가 빠져나갔다. 쇳덩이는 그의 몸을 짓눌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30년 가까이 기름때 묻은 손으로 소방기기를 만들었지만 마지막 순간은 너무 허무했다.
8일 찾은 문래동 골목 안 ○○정공 공장에는 미리 주문 받은 제품을 제조하기 위해 출근한 6명의 직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슬하에 1남2녀의 자녀가 있지만 기술을 배운 적 없는 2세들은 가업을 이어받을 여건이 되지 않는다. 공장은 이미 폐업 상태.
남은 직원들이 어떻게든 공장을 이어가려 애쓰지만 A사장이 갖고 있던 기술 노하우와 영업망 공백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직원은 "사장님 돌아가시고 직원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유족들이 공장을 처분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평소 그와 친하게 지내던 B대표는 "점심 같이 먹고 일한다고 들어갔는데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냐"면서 "평생 고생한 양반이 죽자마자 벌써 장비 한 대는 팔려나가고 공장이 저렇게 되다니 눈물만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A사장의 죽음과 공장 폐업은 한국 소공인들이 처한 열악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위험하고 낙후된 작업환경은 언제든지 산업재해가 발생할 수 있어 시설 현대화 등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대표가 갖고 있는 기술을 전수 받을 기술자들도 적고 또 가업승계 역시 쉽지 않아 수십년 동안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뿌리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고인이 갖고 있던 소방기기 제조기술은 다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공에서 물건을 납품 받던 한 업체는 당장 제품 수급에 문제가 생길 판이다. 문래동 소공인 대표들은 이처럼 특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 있다. 이곳 대표들의 나이는 대다수가 60대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문래동 소공인들은 소공인협회를 중심으로 기술전수, 2세들의 가업승계 등 기술이 사라지지 않도록 여러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해왔다. 특히 고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개소식에 참석해 주목 받았던 '문래동 소공인특화지원센터' 출범의 숨은 공로자여서 소공인들의 슬픔을 더하고 있다.
현재 문래동 소공인특화지원센터는 대로변에 번듯한 3층짜리 건물에 있지만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정공 사무실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고인은 "1,000여곳이 넘는 문래동 소규모 제조공장들이 똘똘 뭉쳐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라며 자신의 사무실 공간을 쾌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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