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은 책을 펴내면 지인들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영리 목적으로 책을 발간하던 시기도 아니고 저자는 이름난 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는 격조 높은 대화가 오갔다. 서구도 비슷했다. 삼권분립과 사유재산제도의 개념을 명료하게 적시한 존 로크도 정부론을 발간하며 친구들과 서신을 교환했을 정도다. 그마저 익명으로 펴냈다. 토마스 맬서스 목사의 인구론 초판도 익명으로 나왔다.
△활자인쇄술이 퍼지고 서적 발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도 출판은 소수 지식인과 부자들의 세계에 머물렀다. 유럽에서 독서의 대중화는 낭독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철도가 이동 시간을 줄이며 저자들은 각 지역을 돌며 낭독회를 열었다. 순회낭독회의 대표주자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 영국 전역은 물론 바다 건너 미국의 대도시에서 낭독회를 열어 독자와 만나고 얘기를 나눴다. 유산 9만3,000파운드(요즘 가치 737억원ㆍ임금 상승률 기준)의 절반이 낭독회를 통해 쌓였다니 꽤나 짭짤했던 모양이다.
△현자(賢者)의 전유물 격이던 저술활동은 자본과 만나 어중이떠중이의 출판기념회를 낳았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졸부들을 중심으로 호화판 출간 파티가 유행처럼 번졌다. 책을 냈다는 명예를 사기 위해서다. 미국 시인 제임스 릴리는 '이름을 떨치려 책을 출판하는 자는 시선을 끌려고 시장에 가는 자와 같다'며 허망한 욕심을 경계했건만 집필의 명예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다. 앨런 그린스펀도, 반기문 국제연합 사무총장도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한국인의 책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가 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한국어판 출판기념회를 서울에서 열며 거액을 챙겨갔다. 그나마 세계적 유명인사들의 자서전은 굵직한 사안들의 뒷모습을 엿보는 맛이 나지만 국내 정치인들의 저술은 내용이 부실한 게 대부분이다. 정치철학이나 비전 제시보다는 자기자랑의 나열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선거철이나 국정감사, 예산 심의 전이면 의원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을 이룬다. 정치자금법을 회피하려는 꼼수요, 빗나간 명예욕의 합작이 아닐 수 없다. 하긴 누굴 탓할까. 그들을 뽑은 게 우리 자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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