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가 돌아온다.
다음달 4일 열리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3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지난 2000~2008년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한 그는 헌법상 3기 연임 금지 조항 때문에 총리 자리로 우회했다가 다시 크렘린(대통령궁) 복귀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면 6년으로 늘어난 대통령직을 연임할 수 있기 때문에 2024년까지 장기집권이 가능하다. 거세진 '반(反)푸틴' 시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60%를 훌쩍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푸틴은 오는 4일 대선에서 과반 득표를 획득하며 2차 투표 없이 승리를 거머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푸틴이 이끌 러시아의 미래가 밝지는 않아 보인다. 그의 장기독재에 대한 반대 여론이 격화하고 있는데다, 카리스마를 앞세운 그가 국내 경제에 대한 규제의 고삐를 죄면서 경제가 역행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푸틴 시대'에는 벌써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1차 투표에서 승리 확정 지을 듯= 2기 푸틴 정부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는 1차 투표에서 50% 이상 득표한 후보가 나오면 곧바로 당선자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1, 2위 득표자가 2차 결선 투표를 치러 다수 득표자가 당선된다.
지금까지 치러진 5차례의 러시아 대선에서 2차 투표까지 간 경우는 1996년 대선밖에 없다. 2차 투표까지 간다는 것은 그만큼 당선자의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의미다. 만일 이번 대선에서 푸틴이 과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를 거쳐야 할 경우 대통령으로 최종 당선되더라도 정권 장악력이 취약해지면서 정국 운영에는 차질이 빚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분위기로는 푸틴이 2차 투표 없이 대권을 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지 여론조사 전문기관 '레바다-첸트르'가 지난 24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푸틴의 지지율은 66%로 올라섰다.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 브치옴이 지난 11~12일 실시한 조사에서도 푸틴에 대한 지지가 54.7%에 달했다.
푸틴의 장기 독재에 대한 반발과 지난해 총선 부정 의혹으로 대규모 항의 시위가 모스크바를 휩쓸면서 한동안 푸틴이 2차 결선투표를 치러야 할 거라는 관측이 제기됐지만,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푸틴은 지지기반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다만 상황을 낙관할 수는 없다. 대선의 전초전 형식으로 지난해 12월 치러졌던 총선에서는 푸틴이 이끄는 통합 러시아당이 과반 의석을 간신히 넘기는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지난 21일 모스크바와 대학 등의 사회학자 등으로 구성된 독립 여론조사 그룹의 발표에 따르면 푸틴의 득표율은 48%에 불과해 2차 투표까지 가야할 것으로 관측됐다. 푸틴의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반발심리를 표출하는 국민들이 수 개월째 러시아 곳곳에서 푸틴 반대 시위와 집회에 나서는 등 사회 불안도 이어지고 있다.
◇경제개혁 등 당면과제 산적= 지난 1990년대 소련 붕괴와 사회 혼란을 겪은 러시아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회 안정'이다. 이들이 푸틴의 장기 집권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는 것은 그의 재집권 실패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푸틴이 대통령 재임중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빈곤을 해소하고 마피아 조직을 척결하는 한편, 전술핵무기 부활 등을 통해 강대국 러시아 재건에 나섰던 모습을 다시 기대하는 국민들도 많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희망대로 사회 안정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성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푸틴이 재집권하면 경제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를 강화해 러시아 경제에 빨간불이 켜질 것이란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ㆍ인도 등 신흥성장국들과 함께 브릭스(BRICS)로 명명되며 빠른 성장세를 보였지만 2기 푸틴 정부하에서는 이를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고유가로 인해 세계 최대 석유생산국인 러시아는 자원의존적 경제구조에서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4%대를 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향후 10년간 높아지기 어려울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푸틴 재집권 후 러시아는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벌써부터 러시아 기업들은 푸틴의 재집권을 우려해 대거 해외로 이탈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이탈한 자본은 800억달러(약 92조원)로 지난 1994년 이후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이민 행렬에 나서는 러시아인들도 급증했다. 여론조사회사 레바다센터가 지난해 5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22%가 해외 이민을 원했다. 러시아 국가회계국의 보수적인 추정으로도 지난 10년간 123만명의 러시아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국제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푸틴의 대권 복귀로 경제개혁이 더뎌질 것으로 보고 러시아 경제에 악재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엘리트들 가운에는 푸틴이 계획한 4선은 물론이고 3선 임기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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