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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아름다움·열정 떠올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게 내 작업
무언가 보려고 노력하면 눈에 사물 들어오고 의미 갖게 돼
창작도 창조경제도 여기서 시작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밟고 밟히는 침목(枕木)도 한때는 향내 나는 나무였다. 던져지고 깨지는 파쇄공(破碎球)도 뜨거운 쇳덩이였던 적이 있었다. 그들의 잊힌 향기와 열정을 캐내듯 찾아 보여주는 이가 있다. 조각가 정현(58·사진) 홍익대 교수다.
삼청로 화랑가에 한옥갤러리로도 유명한 학고재 앞. 어른 가슴 높이의 커다란 바위(?) 두 덩이가 설치됐다. 어떤 이는 "저게 뭐지?"라며 흘끔하고 지나쳤고 만화를 많이 본 모양인 어린아이는 "별똥별"이라고도 했다. 이우환 식의 설치작품을 운운하며 "작품일 거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맞다. 작가 정현의 작품이다. 하지만 바위는 아니다. 쇳덩이다. 거대한 철덩어리를 깨뜨리는 파쇄공으로 원래는 15톤과 17톤의 네모 반듯한 쇳덩어리였다. 자석으로 25m 높이까지 올라갔다 떨어지면서 아래에 있던 철 쓰레기를 박살 내는 게 그 역할이었다. 그렇게 10년 이상 떨어지고 깨뜨리고 깨지기를 반복했다. 오랜 풍화와 침식을 견딘 바위처럼 모서리는 닳았고 크기도 8톤으로 줄었다. 엄청난 낙하 에너지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식기를 반복하다 보니 색깔도 멍처럼 검어졌다.
"제 몸을 갉아먹을 정도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온 파쇄공에서 상처 많은 우리네 모습, 질곡의 현대사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잘 겪어낸 시련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작가는 5년 전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우연히 "시련의 집적"인 파쇄공을 봤고 그 산업현장의 힘을 토대로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이미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기차의 무게를 견디고 버틴 철로 침목을 비롯해 거푸집을 만들고 버려진 철근, 나무전봇대, 콘크리트 같은 세월과 비바람의 흔적이 생생한 소재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구축했다. 하찮은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소재들만 유독 그의 눈에 들어온다.
"속이 꽉 찬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듯 파쇄공에서도 그 속을 꽉 채운 옹골찬 힘이 느껴졌습니다. 조각은 재료가 특히 중요한 분야인데요, 평범한 재료보다는 그것이 갖는 '의미성'에 집중합니다. 이런 게 예술가의 욕구일 수도 있는데 뻔한 재료로 뻔한 일을 하는 것은 재미가 없거든요. 길을 가다가 기왓장이 눈에 들어오거나 수산시장에서 본 생선 부레와 아가미, 틈이 벌어진 벽돌 같은 것도 '재료'로 보이곤 합니다. 일상에서 수집한 그런 느낌들을 늘 내 몸에 축적하죠."
이미 가지고 확보한 것이 많음에도 '조건'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은 현대인에게 그의 태도와 작품은 교훈적이다.
"내가 무언가를 보려고 애쓰면 그것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찾고 싶은 게 있어야 그 사물이 의미를 갖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갈구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다가오는지가 결정되고, 창작이든 창조경제든 그것이 곧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작업은 1960년대 나뭇가지·바위·철판 등 지극히 일상적 재료를 통해 물질의 본성과 삶의 맥락을 바라보게 한 이탈리아의 전위적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를 떠올리게 한다.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고는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예술로 끌어들인 마르셀 뒤샹처럼 작가의 손으로 재료를 가공하는 과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작품이 되게 하는 '오브제 트루베'와도 같은 맥락이다. 제철소에서 닳고 닳은 파쇄공을 그냥 전시장으로 옮겨놓기만 했으니 말이다.
"뒤샹은 변기에 글씨를 써서 '샘'을 완성했지만 저는 그 글씨를 쓰는 것조차도 못하겠습니다. 의미 있게 찾아낸 재료는 그 자체로서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게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존중의 태도라 생각하거든요."
그는 작가의 존재감을 억누른 채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 대신 물질 자체가 갖는 존재의 힘을 여실히 보여줬다.
다음달 9일까지 계속되는 학고재 개인전에서 파쇄공 못지않게 시선을 끄는 것은 70점에 이르는 그의 드로잉. 조각가에게 드로잉은 형태를 탐구하는 사전작업이자 아이디어의 초기 설계도 같은 것이지만 정현 작가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드로잉은 내 몸 어딘가에 응축된 감정을 툭 던져놓는 것"이라며 한 해 500장까지 그릴 정도다. 그런 드로잉에서조차 전통적인 재료를 마다한다. 물감 대신 기름 상태의 끈끈한 검은 액체인 콜타르를 이용한다. 붓 대신 고무장갑이나 구겨진 종이, 고래의 아가미 등을 휘두른다.
"콜타르가 하찮은 재료지만 그 거무튀튀함 속에서 다양한 색깔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그리는 도구 또한 자신이 가진 감정선을 비롯해 그 도구를 움직이는 내 몸의 근육과 맞아떨어져야만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의 드로잉은 사람과 나무를 어떻게 그렸느냐를 따지기보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심신을 맡기면 충분하다. 어디로 더 뻗어갈지 모를 선들, 감정을 억제한 표정들을 따라 눈물 혹은 전율이 흐를 수도 있다.
9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못난 나는 어려서부터 잘하는 게 없었고 삶은 버거웠고 답답했다"는 말로 하찮은 재료에서 귀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이유를 갈음했다. 음악하는 누나, 철학하는 형, 문학하는 동생 틈에서 '순둥이' '울보'로 불렸던 그는 미술반 경험을 디딤돌로 미술가가 됐다. 홍익대 조소과 시절에는 요절한 고(故) 류인(1956~1999)과 더불어 인체 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졸업 후 파리로 유학을 떠난 것도 프랑스 미술이 갖는 전통성이 자신이 추구해온 인체 조각과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콜데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그가 배운 것은 그간 손에 익은 습관과 경직성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간 드러내고 싶어하는 헛껍데기가 많았더라고요. 모든 것을 지우고 비우기를 거듭했더니 속의 알맹이만 남아 내 자신의 사고와 감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에게 작업은 자기 수행의 과정이요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 됐다. 그 예로 살과 근육을 발라내고 뼈만 남은 사람 형상의 청동 조각 '무제'가 있다. 1990년 무렵에 처음 만들었던 것을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제작했다. 작가를 투영한 그 조각이 말한다.
"두 손을 들고 벌서는 모습은 반성과 자기 성찰의 시간을 뜻합니다. 심장에 못이 박혀 있거나 비수가 뚫고 나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가운데서 꽃이 피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격렬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 격렬함이 표출된 후 '그게 무엇일까'를 다시 되돌아보자는 얘기인데요. 군더더기를 제하고 내 속에 있는 '진짜'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기를 청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재료들과 마찬가지로 정현의 작품에서는 '기다림'이 중요한 요소다. 일명 '녹 드로잉'으로 불리는 작품들은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최소 5~6년 이상,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철판을 녹슬지 않게 하는 코팅 페인트로 칠한 다음 그 위를 긁어내서 밖에 내놓았다. 흠집으로 철판이 드러난 부분은 산화하며 녹이 슬었고 그 녹물은 작가가 화판을 놓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내려 형태를 만들었다. 분출하는 화산 혹은 떨어지는 유성우(流星雨), 자라나는 나무이거나 폭포처럼 보이는 드로잉을 두고 작가는 "나는 흠집만 냈을 뿐 자연과 시간이 그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둘러싼 편견을 깨고, 하찮고 버려진 물건에서 소중한 가치를 찾아내는 그의 작품은 묵묵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견디는 힘이며 희망임을 확인시켜준다.
He is… |
"성할 날 없는 손… 재료 중시… 조각가, 요리사와 닮아" 음식 심미안도 뛰어난 정현 교수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