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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잘릴지 몰라 스펙 집착… 직장인 짓누르는 IMF트라우마

부모 실업 공포 겪은 2030 '평생 회사원' 개념 사라져<br>학원 전전 자격증 따기 분주<br>성공위한 노력 탓할순 없지만 불안 치유할 근본수단은 못돼<br>지나치면 현실 적응에도 문제



'한국 왜 이렇게 사나' 참담하다
언제 잘릴지 몰라 스펙 집착… 직장인 짓누르는 IMF트라우마부모 실업 공포 겪은 2030 '평생 회사원' 개념 사라져학원 전전 자격증 따기 분주성공위한 노력 탓할순 없지만 불안 치유할 근본수단은 못돼지나치면 현실 적응에도 문제

이수민기자 noenemy@sed.co.kr

























30대 직장인 최모씨는 최근 사표를 냈다. 회사에 근무한 지는 정확히 4년 2개월. 짧다면 짧을 수도, 길다면 길수도 있는 기간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을 내밀면 상대는 '좋은 곳에 다니시는 군요'라며 으레 좋은 말을 해주었다. 우리나라 5대 기업으로 손꼽히는 회사의 핵심부서에서 근무했으니 다들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물론 취업을 준비했던 4년여 전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전공 공부만 했다면 어느 공장의 라인 감독자로 취직했겠지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취득한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이 지렛대가 돼 기획ㆍ재무 파트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차곡차곡 쌓는 월급만큼이나 '이대로 괜찮을까'하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회사의 조로현상이 가장 두려웠다. 업무평가가 나쁘지 않다면 40대 초중반쯤 팀장을 다는데다 임원 진출에 실패하면 50살이 되기 전에 퇴물이 돼버리는 뭇 대기업 '맨'들의 삶. 그러니 10년 후의 삶이 유동적인 상황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기에 로또에 대한 헛된 꿈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그와 수많은 또래들. 악착같이 모아도 수년 안에 서울에 번듯한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집안 사정. 쉽게 풀리지 않을 이런 고민들도 불안의 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고심하며 써 내려간 사직서를 들고 면담을 요청한 그에게 팀장은 "최 대리, 요새 경기도 좋지 않은데 경영석사과정(MBA) 다녀오면 뭐 뾰족한 수라도 있는 줄 아냐"며 한 번만 봐줄 테니 휴가나 다녀오라고 인심을 써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얻은 미국 MBA 입학허가와 장학금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 괜찮은 직장을 잘 다니던 친구들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일도 그가 서른 두 살에 미국행을 감행한 이유가 됐다. 대학 시절 법과 거리가 먼 학과를 다녔고 졸업 전에 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따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그의 고등학교 동기 이모(32) 회계사는 재작년 로스쿨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내도 있었지만 "매일 재무제표나 보고 살고 싶지는 않다. 아기가 태어나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자신의 3년을 배팅했다.

최 대리의 대학동기 강모(33)씨도 유명 손해보험사에 3년간 근무하다 지난해에 중국 상하이로 MBA를 떠났다. 주말에 술이라도 마시자고 불러내면 "영어 스터디 가야 한다"거나 "내일이 토플 시험이다"라며 본의 아니게 친구들의 원성을 샀던 강씨는 중국으로 학교가 결정되자 회사를 때려치우고 중국어 학원을 다니며 막연한 미래에 '올인'했다. 국내에 자리가 없으면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겠다는 포부였다.

오히려 최 대리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함께 지원한 MBA에 합격한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불안과 마주했다. 대개는 그보다 상당히 어렸고 아니면 회사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 '외유성'으로 해외 MBA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길지 않은 경력에 붕 뜨는 나이, 지금의 모험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하는 걱정이 새롭게 시작됐다.



최근 직장을 다니는 20, 30대 10명 가운데 4명은 자신의 학력이 업무수준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직장인들은 자신의 현재 스펙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방식이든 새로운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 스펙 과잉이라고 말하면서도 스펙에 매달리는 모순된 현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들은 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일까. 겉으로만 보면 글로벌 경기침체에 고령화까지 더해지면서 요즘 경제사정이 좋지 않는 점이 일차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경기침체로 구조조정이 상시화되면서 조기 퇴직이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불안감의 뿌리는 훨씬 더 깊다. 바로 외환위기의 트라우마다. 이들이 청소년이었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사태로 부모들이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평생직장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안정된 직장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스펙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다.

박용천 한양대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IMF 사태 때 받은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 20~30대가 토로하는 불안심리에도 어릴 적 경험이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렇게 스펙을 쌓는 것이 심리적인 위안은 줄 수 있어도 불안감을 없애주는 근본적인 치유책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한창수 고대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외모나 옷차림으로 상대의 첫인상을 판단하듯 스펙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하다"며 "또한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월소득 150만원이나 1,500만원이나 비슷한 것을 욕망하고 남을 나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스펙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인생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는 비교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분투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스펙을 좇는 젊은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분석도 있다. 박용천 교수는 "성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려 노력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며 "문제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스펙을 쌓느라 시류에 휩쓸리면서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업무에도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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