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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90> 광장식 소통과 계단식 소통

광장에 비가 내린다/주검을 의심하고 죽어버린 듯한 목숨이/그만치 사연을 두고 떠난 그날

주먹밥을 건네시는 어머니 손등에서/세월의 아픔들이 실핏줄되어/깊은 강물 속으로 자맥질하듯

애절한 목숨의 비가 내린다 <김윤환, 광장에서>

정치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허주 김윤환의 ‘광장에서’라는 시에는 많은 비유가 등장합니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시인이 생전에 지향했던 정치적인 행보와 비슷한 관점을 취한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김윤환에게 ‘광장’은 사람들 간의 높낮이가 존재하지 않는 서로 동일한 조건으로 희극과 비극을 맞이해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중심에 있건 또는 주변부에 있건 간에 서로 같은 눈높이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어지럽게 섞였다가 흩어지는 장소입니다. 광장의 반댓말은 ‘계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우리는 ‘폐하’, ‘전하’, ‘각하’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모두 윗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이나 서로 소통할 때에 각각 달리 주어지는 물리적 위치를 염두에 둔 존칭이었습니다. 윗자리에 있는 ‘그분’은 눈도 마주칠 수 없는 당신이었습니다. 일단 만나 주실 것을 청하고, 그 다음에는 한번 절을 하고 안건을 아뢰고, 그리고 승낙이 떨어지면 본격적으로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어려운 소통 체계를 상징하는 표현이 폐하, 전하, 각하라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는 계단식 소통에 매우 익숙한 듯 합니다. 청와대에서도 ‘대통령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고 공직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꽤 오랫동안 홍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각하’라는 말을 일부러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존칭을 썼다고 국가원수 본인이 고마움을 표하거나 반색을 했던 적은 한번도 없고, 오히려 부담스러운 기색만 내비쳤던 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극단적으로 조아리고, 또 자신도 그 입장에 놓였을 때 상당한 예우를 해 주길 바라는 습관은 평소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직장에서 화 내기를 자제하지 못하는 상사, 성과를 만들어 오라고 주문하면서 자신은 딴전이나 피우고 정치에 골몰하는 리더 등이 계단식 소통의 인습에서 출발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한 요즘은 더욱 광장식 소통법이 강조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서로 똑같은 높낮이의 조건에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곳에 있지도 않은 계단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촌스럽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서열과 시스템을 전제한 대화를 좋아하는 정치인들은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이 계단식 소통법의 전제에 입각해 내뱉었던 언어 습관이나 행동 패턴 등은 패러디의 소재가 되기 일쑤입니다. 얼마 전 엘리트들의 사고를 꼬집는 풍자 드라마 속에서 대형 로펌의 대표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이 시대에 귀족이 어디 있습니까. 다 시민이지요.’ 물론 등장인물의 역설적인 대사였지만, 문자 그대로 본다면 광장의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드넓은 광장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계단을 만들려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괜찮아요’라며 시민들을 위로했던 리퍼트 대사가 상당히 노련한 소통 전문가처럼 보이는 것 또한 ‘광장의 시대’에 알맞은 대처법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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