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행복이 군주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 군주는 제1의 공무원일 따름이다.’ 프로이센의 계몽전제군주 프리드리히 2세가 왕자 시절에 지은 ‘반(反)군주론’의 한 구절이다. 업적이 많아 프리드리히대왕으로 불리는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것은 병약. 허약한데다 제왕학보다는 음악과 시를 좋아해 아버지의 질책 속에 자랐다. 엄격한 부친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하려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1년을 감옥에서 지낸 적도 있다. 1740년 2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의 모습은 딴판. 가는 곳마다 승리를 따냈다. 오스트리아와 두 차례 전쟁을 벌여 핵심 공업지대인 슐레지엔을 차지하고 폴란드 땅도 일부 빼앗았다. 국토를 넓힌 것은 운도 따랐지만 뛰어난 지략 덕분. 훗날 나폴레옹은 그를 ‘역사상 최고의 군사전략가’라고 치켜세웠다. 서민교육 확대, 헌법 제정, 학술원 설치 등의 목적도 모두 군사용. ‘독일 음식’하면 떠오르는 감자를 대량 보급, ‘감자대왕’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전투식량 확보 차원에서다. 세제정비, 산업 진흥과 유대인 보호를 통한 금융산업 육성도 역시 국방비 마련을 위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 같은 반열의 ‘철학군주’로 자처하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 칸트와 괴테ㆍ바흐ㆍ모차르트 등을 길러냈다. 플루트 연주가로 100곡의 작곡도 남겼다.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펼치며 1786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부친이 물려준 상비군은 8만명에서 20만명으로 불어나고 예산도 5배로 커져 있었다. 후대 독일 황제와 재상들도 재위 46년간 프로이센을 변방국가에서 강대국으로 키운 그를 본떴다. ‘철혈정책’ ‘인재양성’의 원전이 바로 프리드리히 2세다. 현대 독일의 씨앗이 그에게서 뿌려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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