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말 4,800억원의 유상증자를 결의한 SK건설. 국내 순위 8위의 SK건설이 올해 1ㆍ4분기, 2ㆍ4분기 연속 적자를 내며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된 주 요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 중인 '와싯 가스개발 프로젝트' 다. 실제 공사비가 당초 계약금액을 크게 웃돌면서 SK건설은 이 사업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발주처는 사우디 국영석유회사이자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아람코(ARAMCO)사다.
넘치는 오일 달러를 기반으로 한 발주 물량과 중동 플랜트의 '상징'이라는 입지를 무기로 국내 건설업계의 '슈퍼 갑'으로 군림한 아람코. 이 회사가 최근 국내 대형 건설사의 핵심 '리스크'로 부각되고 있다. 아람코로부터 수주한 프로젝트에서 대부분 거액의 손실을 입어 각 건설사 재무구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7일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국내 건설업계의 중동 수주물량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지난 2008년 이후 6년 동안 국내 건설사들이 아람코(컨소시엄 및 합자회사 포함)로부터 수주한 물량은 총 50건, 금액으로는 208억5,000만달러(한화 약 22조1,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건설사들이 매년 34억달러 이상을 아람코로부터 수주 받은 것이다. 최근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 규모가 연 평균 350억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아람코의 발주 물량이 중동 전체의 10%에 달하는 셈이다. 특히 아람코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전세계 플랜트 발주 물량이 급격히 줄었던 때에도 풍부한 오일 달러로 꾸준히 신규 공사를 벌이며 국내는 물론 일본ㆍ유럽 건설업계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까다로운 공정에 공기 늘어나 손실 눈덩이=국내 업계는 아람코 물량을 따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공정관리와 공사 자격 요건이 까다로운 아람코의 프로젝트를 따내면 플랜트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어서 중동 시장 확대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본격화된 주택시장 침체 등으로 국내 건설 물량이 줄면서 대형건설사의 경우 해외 수주 증대에 매진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는 기회보다 손실이 더 컸다는 게 플랜트 담당자들의 고백이다. 대형건설사의 한 해외영업 관계자는 "당초부터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가격에 시공을 맡은데다 까다로운 공정에 공기가 늘어지면서 손실이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며 "솔직히 아람코 공사는 국내 업체들이 맡아서는 안 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결국 공사가 끝났거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경우 이미 발생한 손실을 털어내느라 분주한 형편이고 사업 초기 단계인 공사도 저가 수주 탓에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쥐어 짜내고 있는 상황이다.
◇신규 수주 물량도 수익성 장담 못해=국내 건설사 중 아람코 리스크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곳이 바로 삼성엔지니어링이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최근 5년 동안 아람코 및 사토프(아람코와 프랑스 토털의 합작법인)로부터 10개의 공사를 수주했다. 특히 이중 사토프로부터 수주 받은 주베일 정유플랜트와 아람코 물량인 샤이바 가스전 프로젝트에서 거액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반기 3,085억원의 영업적자에 이어 3ㆍ4분기에도 7,468억원의 적자를 낸 삼성엔지니어링은 실적 발표 후 "샤이바 가스전 프로젝트 등에서 2,000억원의 비용이 더 들어갔다"고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주베일 정유플랜트의 경우 가격이 낮은 납품업체 제품으로 설계했다가 아람코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설계를 변경하면서 2,000억원가량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림산업이 2011년 9월 계약한 RTIP 프로젝트(석유화학 단지 조성 공사)의 경우 공사 초기 설계상의 오류로 전 공정을 재검토하는 등 일찌감치 우여곡절을 거쳤다. GS건설과 대림산업이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수주한 라빅 2프로젝트(정유 및 석유화학단지 조성 공사) 역시 저가 수주 탓에 공사 원가를 낮추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게 플랜트 업계의 전언이다.
전문가들은 이미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세계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만큼 '아람코 리스크'와 같은 손실을 예방할 수 있는 수주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플랜트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년 동안 중동 플랜트 시장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은 만큼 국내 EPC 업체들이 '아람코 스펙'을 쌓기 위해 수업료를 지불해야 할 단계는 지났다고 본다"며 "입찰 전에 공사원가 등을 따져 적정한 마진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수주전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미 대형사들이 시작한 신흥 시장 및 신공종 확대 전략을 가속화해 해외시장에서 새로운 포트폴리오가 구축될 경우 최근 유럽 EPC 업체와 같이 수익성 우선으로 입찰에 참여하는 전략 구사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