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셰일 가스 혁명이 유럽 경기 침체로 가뜩이나 취약한 러시아 경제를 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한 때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었던 미국이 셰일가스 혁명으로 글로벌 천연가스 시장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며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과거 냉전 시대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군비경쟁과 봉쇄 정책으로 구 소련 붕괴를 촉발했다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셰일 가스 혁명으로 러시아 경제가 골병이 들고 있는 것이다.
◇'자원의 저주'에 걸린 러시아= 지난 11일 안드레이 클레파크 러시아 경제부총리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3.6%에서 2.4%로 또다시 낮췄다. 올해 초 제시한 5.0%에 비해서는 반 토막 수준이다.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경제개발부 장관은 "경제 부진으로 인해 러시아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3% 달성이 어려워질 전망"이라면서 "1ㆍ4분기 GDP 성장률이 1% 미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유럽을 비롯해 글로벌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천연가스 수출과 투자가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오트크리티 파이낸셜의 블라디므르 티코미로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 미만의 성장률은 스태그네이션(장기 경제침체)에 가깝다"고 혹평했다. 러시아 노모스 뱅크의 한 애널리스트도 "러시아가 이미 불황에 진입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 동안 국제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거듭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천연가스 수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석유가스 부문이 러시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95년 42.6%에서 2011년에는 70.2%로 무려 27.6%포인트나 튀어 올랐다. 석유가스가 재정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0년대말까지 10% 미만이었지만 2011년 49.2%까지 폭등했다.
이처럼 러시아 경제 전반이 '자원수출형 경제'로 고착화하는 와중에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몰락하고 말았다. 제조업이 붕괴되면서 소비재 43%를 해외에서 수입할 정도다. 천연가스 가격 하락이라는 악재를 돌파할만한 수단이 사라지면서 이른바 '자원의 저주'에 걸린 셈이다.
◇셰일가스 혁명에 엎친 데 덮친 격= 미국발 셰일가스 혁명도 이 같은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현재 셰일가스 붐은 미국 경기 회복의 주요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에너지 비용 부담이 뚝 떨어지자 해외로 나갔던 미국 제조업이 돌아오고 유럽 제조업체도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속속 옮기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 최대 화학 업체인 바스프(BASF)가 오는 10월 미 루이지애나 주에 새로운 포름산 제조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며 오스트리아 철강 업체 보에스탈파인은 미 텍사스에 7억1,500만 달러를 투자해 철강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은 2007년 유럽의 80%선에서 올해 2월 현재 4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셰일가스 혁명은 러시아에 초대형 악재이다. 천연가스를 수입하던 미국이 국내 셰일가스 개발로 수입량을 줄이자 그 물량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가격인하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실제 러시아 국영 석유·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은 지난해 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5개국 에너지 기업과의 가스 공급가격을 약 10% 인하하고 11월에는 폴란드에 공급하는 가스 가격도 16% 내렸다.
러시아는 2002년 이후 세계 1위 천연가스 생산국 지위를 유지했으나 2009년을 기점으로 미국에게 뒤쳐지게 됐다. 2001년 미국은 6,513억㎥의 천연가스 생산량으로 1위, 러시아는 6,070억㎥로 2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과학원 산하 에너지연구소는 미국ㆍ캐나다가 개발에 적극적인 셰일유ㆍ가스 때문에 2040년에 러시아의 원유 수출이 한 해 최대 5,000만톤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출구 보이지 않는 러시아 경제= 이처럼 러시아 경제가 꼬꾸라질 조짐을 보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외국인투자 유치와 규제 개혁, 부정부패 척결, 금융완화 등 성장 친화적인 정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금리 인하를 거부한 세르게이 이그나티예프 총재를 사실상 경질하고 후임에 최측근인 엘비라 나비울리나 수석 경제보좌관을 지명하기도 했다.
특히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해 자국 제조업을 육성해 에너지 의존형 경제구조를 개편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2011년 '투자전략청'을 설립해 비즈니스 장벽을 제거하고 투자환경 개선 전략 수립을 전담하도록 했다. 투자 옴부즈맨 제도로 고충처리를 돕는 등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북극 곰' 러시아의 추운 겨울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자존의존형 경제 구조를 쉽게 바꾸기 어려운 데다 푸틴 정부의 불투명한 규제와 정실주의, 국수주의 성향이 여전한 탓이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일 하노버 산업박람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로부터 훈계를 듣는 수모를 겪었다.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가 경제를 혁신하고 혁신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면서도 "러시아 경제는 여전히 천연자원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다"고 비판해 러시아가 개혁에 적극 나서야 경제 협력이 가능하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실제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5년 전에 파산한 러시아 재벌을 도와달라고 외국 은행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최대 국영 은행인 OAO 스베르방크와 VTB 등은 외국계 은행과의 업무 수수료를 5배 늘리면서 UBS, 도이체방크, 스코틀랜드왕립은행 등에 부담을 주고 있다.
또 경기 회복을 위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도 물가 상승의 부작용만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물가 상승률은 이그나티예프 총재의 긴축에 힘입어 지난 2002년 17%에서 지난해 7.3%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