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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가 무려 80억원에 달하는 초호화 타운하우스 '판교 산운 아펠바움' 청약이 지난해 10월 금융결제원을 통해 시작됐다. 1순위 청약자는 청약통장을 2년 이상 보유한 무주택자다. 그러나 청약자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타운하우스는 전체 가구 수가 34가구로 현행 주택법상 사업계획승인 대상이라 정식 청약 절차를 밟아야 한다. 건설업계에서는 당시 "80억원짜리 주택까지 무주택자에게 우선 공급하는 청약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희극"이라는 말이 나왔다. 반면 GS건설이 지난 6월 서울 청담동에서 분양한 '청담 자이' 아파트 청약의 경우 16가구 모집에 무려 736명이 신청하면서 평균 46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89㎡(이하 전용면적) 주택이 12억4,000만원에 달할 정도의 높은 가격이었지만 청약자들이 대거 몰린 것은 공급물량이 20가구 미만이어서 청약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 임의분양 방식으로 공급됐기 때문이다. 이는 유주택자들이 청약에 몰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유연성 없고 획일적인 청약 제도가 가뜩이나 어려운 주택시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과거 '1가구 1주택 보유'라는 정책적 당위성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청약 제도가 이미 '강산이 바뀐' 부동산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거나 오히려 확대되면서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구시대'적인 제도는 민영주택 청약제도다. 현행 주택공급 체계는 주택법상 사업계획승인 대상인 20가구(다세대ㆍ연립은 30가구) 이상의 모든 아파트는 정부가 정한 '주택공급규칙'에 따라야 한다. 공급 절차는 일선 시ㆍ군ㆍ구청장의 분양계획승인을 받아 입주자모집공고를 낸 뒤 규칙에 따라 순위별로 청약을 받도록 하고 있다. 청약순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청약통장가입기간과 무주택기간이며 이를 바탕으로 당첨자 선정 기준인 '청약 가점제'가 만들어졌다. 85㎡ 이하 주택은 공급물량의 75%를, 85㎡ 초과 주택도 50%는 청약가점제로 당첨자를 결정한다. 여기에 분양가상한제 적용까지 받으면 택지비와 기본형건축비, 그리고 몇 가지 가산비용 외에는 가격에 포함시킬 수 없다. 이 같은 주택 공급 기준이 만들어진 이유는 주택보급률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투기를 방지하고 '1가구 1주택'이라는 정책 목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국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고 최근 1~2년간 수도권 곳곳에서도 미분양 주택이 쌓임과 동시에 청약통장이 필요 없는 선착순 분양시장이 대세를 이루면서 이 같은 청약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대형건설사인 D건설사의 분양팀장은 "100㎡를 넘는 아파트는 무주택자보다 기존 소형 주택을 중대형으로 갈아타려는 교체수요가 대부분"이라며 "이 때문에 마케팅 때도 무주택자가 신청하는 1순위보다 3순위 이후 청약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초고층주상복합 등 대형 아파트 위주의 고가주택은 아예 청약 전에 특정 수요층을 대상으로 DM을 발송해 '예약'을 받아놓기도 한다. 어차피 해당 아파트가 무주택자가 아닌 고급주택 수요층을 겨냥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건설산업연구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ㆍ4분기 기준 무주택자가 82㎡의 수도권 아파트를 집값의 50%를 대출해 신규 분양 받으려면 가구 소득 기준 상위 30%(7분위)의 고소득자여야 했다. 그러나 이미 1주택을 보유한 소비자가 기존 주택을 처분하고 집값의 30%를 대출받아 신규 주택을 구매한다고 가정하면 가구 소득 상위 70%(3분위)에 속한 수요자도 전용 82㎡ 아파트를 분양 받는 것이 가능하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박사는 "이제 신규 민영주택 분양시장은 무주택자보다는 기존 집을 팔고 새집을 사려는 교체 수요자 등에게 적합한 상품이 대부분"이라며 "청약제도도 이에 맞게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수요층이 제한돼 있는 수십억원대 고급주택시장까지 청약제도가 적용되면서 법을 지키기 위해 의미 없는 청약 일정을 진행하는 웃지 못할 일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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