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이소(1957~2004)는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 의미 있는 현대미술가입니다. 이것은 한국 작가가 가진 영원한 숙제이기도 한데 그는 겸재 정선의 작품이나 한글을 차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세계무대에 접근했죠."
독립 큐레이터 김선정(49·사진) 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예술감독(전 아트선재센터 부관장, 전 한예종 교수)이 요절한 작가 박이소 10주기 개인전을 기획해 1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미리 공개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로 꼽히는 박이소는 '박모(Mo Bahc)'라는 이름으로 지난 1982~1995년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2003년과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를 비롯한 유수의 국제 미술제에 참여했으며 1991년 미국연방예술기금 회화상, 2002년 에르메스미술상 등을 받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2004년 4월 청담동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김 큐레이터는 "1992년 뉴욕에서 처음 만난 박이소는 나의 조언자이자 '친구'라고 말하고 싶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생전에 개인전 한번 못 만들었던 게 마음에 걸려 이번 10주기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히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이소는 타계 이후인 2006년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현 플라토)에서 개인전이 열렸으며 같은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예술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떠났어도 이후 굵직한 국내외 그룹전에서 꾸준히 그의 작품이 초청 받고 있다.
김 큐레이터가 기획해 19일부터 아트선재센터 2층에서 개막하는 이번 전시는 박이소의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준다. 입구 벽에는 이른바 박이소의 '바보서체'로 "잡초도 자란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선보였던 한글 문자 작업이다. 벽을 향한 선풍기, 벽을 비추는 조명 등의 설치작품도 눈에 띈다. 김 큐레이터는 "외국인이 읽을 수 없는 한글이나 벽으로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이렇게 표현해 서구 안에서 살아가던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통로 끝에 문을 만들어 관람객이 전시장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와 다시 감상하게 만드는 엉뚱한 설치작품부터 커피·콜라·간장으로 3개의 별을 그려 동서 문화사를 함축한 '스리 스타 쇼', 건물 옥상에 CCTV를 설치해 실시간 하늘을 4개의 바닥 스크린에 비춰 보이는 작품 등은 기발하면서도 서정적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외동딸이자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의 부인이지만 배경을 멀리하고 자신의 힘으로 미술계에 뿌리를 내린 김 큐레이터는 "1998년 미술가 이불의 개인전을 기획했을 때 '더 크게 해보라'고 자신감을 북돋아 준 게 내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의 한국 미술도 박이소에게 큰 힘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다. 전시는 오는 6월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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