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1945년)→300만(1946년)→150만(1947년).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연도별 병력 수다. 병사들이 누린 귀향의 기쁨은 곧 한숨으로 바뀌었다. 전시 완전고용의 붕괴 탓이다. 일본 항복 6개월 후 300만명이 직장을 잃었다. 실업률이 한때 20%를 넘어선 적도 있다. 대공황기의 고실업 재연이라는 공포 속에서 미국은 ‘고용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격론에 빠졌다. 트루먼 행정부가 추진했던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조항에 기업인들이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 사기업을 파괴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며 맞선 것이다. 결국 고용법의 범주는 ‘노동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고 직업을 찾는 사람들’로 정해졌다. 트루먼은 대폭 수정된 ‘고용법(The Employment Act)’에 불만이었지만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서명일시 1946년 2월20일. ‘반쪽짜리 고용법’은 경제사의 흐름에 보이지 않는 변곡점이었다. 완전고용 예산과 행정부ㆍ의회의 합동기구 설치가 무산되는 대신 경제학 전문가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국가 경제정책 수립의 중심부에 들어선 것이다. 공식적으로 첫 경제자문을 얻은 첫 대통령인 트루먼이 ‘경제학자들은 한편으로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렇다고 말하는데 나는 한쪽으로만 얘기하는 경제학자가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이 무렵이다. 경제자문위는 갈수록 그 기능을 더해갔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경제자문위원장 출신이다. 고용법 자체도 효력을 나타냈다. 법이 발효된 1946년 말 이후 미국 경기는 유럽의 전후복구 수요 덕에 상승세로 돌아선 후 한국전쟁 특수까지 누리며 1960년대 중반까지 장기호황 가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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