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 26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힐러리 다이앤 로댐은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맞는 모범적이면서 공부 잘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10대 후반이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힐러리는 고교 졸업 전인 1964년에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의 지역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5년 미 동부의 유명 여자 대학인 웰슬리에 입학한 힐러리는 정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도 ’공화주의자 클럽‘이라는 동아리를 이끄는 등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워 갔다.
힐러리가 공화당원에서 민주당원으로 전환한 계기는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이었다. 특히 1968년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사건과 베트남 전쟁은 힐러리의 정치 지향을 바꾼 주요 계기로 지목된다.
1969년 힐러리는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곧바로 한 살 많은 아칸소 주 출신 법학도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사건은 힐러리의 장래를 결정한 일로 평가된다.
1975년 10월 빌과 결혼한 힐러리는 남편과 함께 아칸소 주로 향한다. 1976년 빌이 아칸소 주 법무장관으로 일하게 되자 힐러리 역시 로즈 법무법인에 입사해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꾸준히 경력을 쌓고 1978년 처음으로 당선된 뒤 꾸준히 아칸소 주지사로 일하는 동안 힐러리 역시 연방정부기관 이사나 아칸소 주 교육표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무 감각을 유지했지만, 빌이 1991년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힐러리는 자신의 일을 가진 주지사 부인과 1980년 태어난 딸 첼시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주력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 칭호를 얻었지만, 분석가들은 빌의 재임 기간에 힐러리는 자신의 일과 남편의 일 사이에서의 고민은 물론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숙고하기 시작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특히 빌의 첫 임기 때 불거진 아칸소 주 화이트워터 지역 부동산 개발 사기 사건과의 연루 논란인 ’화이트워터 사건‘과 남편의 두 번째 임기 때에 터진 불륜·탄핵 파문은 힐러리의 고뇌를 한층 더 깊게 만들었고, 결국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나서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고 분석가들은 설명했다.
상원의원으로 있던 시기에는 두드러진 업적을 냈다기보다는 ’정치인 힐러리‘라는 이미지를 굳혀 가는 과정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대통령 부인 출신 첫 상원의원으로서 2003년 출간한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에서는 자신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선언한 점도 그런 평가의 바탕 중 하나다.
2007년 힐러리는 드디어 대통령 부인이 아닌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을 드러냈다.
꾸준한 준비 덕에 선거운동 초반에는 예비주자 중 주목받기도 했던 힐러리였지만, 일리노이 주에서 정치 기반을 닦은 ’초신성‘ 버락 오바마의 빛에 압도됐고, 결국 2008년 6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오바마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힐러리가 오바마 1기 행정부의 국무장관 자리를 받아들인 일은 오바마의 포용력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있지만, 힐러리 자신의 정치 감각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뜻한다는 분석 또한 있다.
미국 대통령이 되려면 자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미국 외교의 사령탑인 국무장관 자리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국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힐러리는 그 후 약 1년6개월 간 차근차근 두 번째 대권 도전을 준비해 왔다.
새 자서전 ’힘든 선택들‘을 펴내는 한편 딸의 출산을 계기로 자신의 여성성을 부각시켰고, 2012년 리비아 벵가지 영사관이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아 리비아 주재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숨진 ’벵가지 사건‘에 대한 공화당의 공세에 대해서도 대응 논리를 개발해 왔다.
워싱턴DC의 정치 소식통들은 힐러리가 후보경선 과정에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과 다시 한 번 대면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그에 대응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권 도전이라는 큰 결단을 다시 한 번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클린턴 전 장관이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미증유의 대기록을 향해 전진하지만, 앞길이 순탄치는 않을 전망이다.
’클린턴 재단‘ 외국 기부금 논란, 재직 중 개인 이메일 사용 논란, 벵가지 사건 등 공화당이 주요 공세 포인트로 삼는 소재 하나하나가 간단치 않은데다 70세에 가까운 고령에다 그에게 덧씌워진 ’올드 이미지‘와 ’부자 이미지‘ 역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정치 분석가들은 클린턴 전 장관이 결국 이런 ’악재‘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에 그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디지털미디어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