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3월4일, 미국 캔자스주 릴리 기지. 병사 한 명이 열과 두통을 호소하며 의무실을 찾았다. 하루 뒤 환자는 500명으로 불어났다.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 시작된 것이다. 스페인 독감은 불과 20개월 만에 수천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공포의 질병. 추정 사망자 4,000만~5,000만명이 정설이었지만 최근에는 최소 5,000만명, 최대 1억명이 죽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인류역사상 최대의 재앙이다. 짧은 기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희생된 경우는 전쟁과 전염병ㆍ자연재해를 통틀어 스페인 독감뿐이다. 릴리 기지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전시 언론검열 탓이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유럽에 파견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그해 7월부터는 ‘스페인 독감’이라는 병명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1차 대전의 비교전국이던 스페인에서는 보도통제가 없어 집단사망 소식이 그대로 전해졌기에 병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굳어졌다.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 스페인 독감에 면역력이 약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주로 희생됐다. 특히 영유아들은 감염 즉시 사망했다. 불결한 거주환경과 전투, 독가스 공격에 지쳐 있던 병사들도 죽어나갔다. 미군의 스페인 독감 희생자는 전사자의 두 배가 넘었다. 독일의 사회ㆍ경제학자 막스 베버도 이때 사망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14만명이 죽었다. 1919년 겨울 갑자기 없어진 스페인 독감은 과연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스페인 독감의 병원균(H1NI)과 조류독감 병원균(H5NI)이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언제 재연될지 모를 재앙에 뾰쪽한 대안도 없다. 약효가 검증되지 않은 예방백신마저 크게 부족하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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