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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열정을 머금은 특유의 노란색 화면 뒤에는 황색증(압생트 술 중독으로 시야가 노랗게 변하는 현상)의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 마티스의 빼어난 조형감각을 보여주는 색종이 콜라주에는 말년에 관절염 등으로 인한 통증으로 붓을 쥘 수 없어 종이를 잘라 붙이기 시작한 화가의 의지가 담겼다. 미국 작가 척 클로스(68). 미니멀리즘 기법으로 극사실주의 화법을 구현하고 추상화로 구상인물화를 완성한 현대미술의 거장. 그는 심각한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어 같이 일하던 큐레이터도 미술관이 아닌 맥락 없는 공간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학교생활을 괴롭혔던 난독증은 좌우를 뒤집어보는 증상을 보였다. 어쩌면 인물화에 대한 그의 애착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형상을 거꾸로 인식하는 장애는 오히려 천부적인 판화적 재능으로 승화됐다. 척 클로스의 개인전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린다. 서울 신문로2가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은 ‘위대한 모험, 척 클로스’전을 19일부터 오는 9월25일까지 연다.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시작된 세계 순회전 중 12번째 전시 도시인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작품은 커다란 모눈종이에 무심히 그은 빗금들, 혹은 마름모 안에 색색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추상적 이미지의 조합이지만 한두 걸음 물러서면 사진처럼 생생한 인물화와 마주치게 된다. 기하학적인 요소들은 사람의 눈에서 재조합 돼 머리 속에서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른거리는 인상은 감상자들에게 오히려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이것이 척 클로스를 전후(戰後) 현대미술가 중 으뜸으로 손꼽히게 하는 이유다. 작가는 자화상이나 주변 인물을 주로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판화작업을 유독 즐긴다. 조카 엠마의 초상화는 113개의 색이 사용된 판화를 만드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 피로한 노동집약적 작업을 두고 작가는 “천천히 드러내는 느림의 미술인 판화가 좋다”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전시장 오른쪽 벽에는 시가 35억원의 유화 ‘엠마’가, 왼쪽에는 4,000만원 이상에 거래되는 판화작 ‘엠마’가 걸려있다. 가운데 소개된 목판 제작과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상하면 색이 포개져 형상이 구체화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또 작가는 동일한 이미지를 표현하더라도 장난치듯 손가락 지문을 찍어대고, 마구 그린듯한 색연필 자국을 겹치는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한다. 이번에 전시된 142점의 판화에도 갖가지 판화기법이 동원됐다. 전시기획자 테리 술탄씨는 “다양한 색깔이 모여 형상을 만드는 척 클로스의 작업 과정을 보여줘 관람객이 교감할 수 있게 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어렵게 예일대를 졸업하고 메사추세츠 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척 클로스는 1980년대 후반부터 마비증세를 동반한 척추장애로 투병 중이지만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끈질기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02)737-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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