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EU가 17일 각각 현 우크라이나 사태에 연루된 블랙리스트 인사 11명, 21명을 선정해 자산동결 및 여행금지 조치를 단행하자 푸틴은 곧바로 대응했다. 우크라이나 내 크림자치공화국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한 것이다. 전날 국민투표에서 러시아 귀속을 선택한 크림자치공화국은 개표종료 이후 곧바로 독립국가임을 선포하면서 유엔 및 각국에 이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푸틴의 크림 독립국 지위 인정이 곧바로 크림과 러시아 간 병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러시아 하원과 상원의 승인에 이어 푸틴의 서명 등 절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날 푸틴의 서명은 "크림의 러시아 귀속이 물리적으로 수일 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이 같은 푸틴의 행보가 계속되자 서구권의 솜방망이 대처에 대한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실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7일 발동한 행정명령(EO)에 따라 블랙리스트에 오른 러시아 인사는 푸틴 대통령의 핵심 참모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전 부총리와 세르게이 글라지예프 고문, 드미트리 로고진 부총리, 발렌티나 마트비엔코 상원의장 등 정치권 인물이 대다수다. 푸틴 본인이나 그의 돈줄인 '올리가르히(신흥재벌)'는 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 EU가 꼽은 제재 인사 21명에도 러시아 의회 및 군부 인물만 포함됐을 뿐 푸틴의 핵심 측근은 한 명도 없다는 게 외신들의 지적이다.
이를 놓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바마는 맞대응할 만한 맷집이 없다'는 푸틴의 시각을 재확인시켰다"며 "미국을 약해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효과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제재 인사로 선정한 로고진 부총리마저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이) 장난하는 것 같다"고 조롱했을 정도로 서구권이 꺼내든 러시아 제재는 비웃음만 사고 있다.
특히 러시아 리스크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원자재 시장도 서구권의 제재 발표 이후 오히려 가격이 하락해 서구권의 제재에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방증했다. 17일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거래일 대비 0.8% 떨어졌고 22개 원자재선물 가격을 종합한 다우존스-UBS원자재지수도 0.57% 하락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푸틴을 직접 겨냥한 고강도 경제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푸틴 본인을 직접 제재 대상에 포함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알렉세이 밀러 가스프롬 사장이나 이고르 세친 로스네프트 사장 등 푸틴의 '돈줄'를 옭아매는 방식 등이 검토돼야 한다는 것이다. 미 상원의 크리스 머피(민주당) 의원은 WSJ 인터뷰에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러시아 경제에 실질적 타격을 주지 않는 한 푸틴은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러시아가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경우 검토할 수 있는 추가 제재에 어떤 개인이나 행위를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푸틴의 직접제재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다만 에너지·금융 분야 등에서 러시아와 현격한 이해관계를 가진 EU가 사실상의 최후통첩 카드를 사용하는 데 여전히 주저해 서구권이 실효성 있는 공동대응 방안을 내놓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와 관련, EU는 20~2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여는데 여기서 러시아 고위인사에 대한 추가 제재 방안이 나올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캐서린 애슈턴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그들(러시아)은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있다. 우리(EU)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해 고강도 추가 제재를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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