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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클릭] 회사채 신속인수제


2003년 6월 미국이 하이닉스(옛 현대전자)에 44%에 이르는 보복관세 부과를 결정했다. 빌미는 회사채 신속인수제. 회사채 인수를 통한 자금지원이 불공정 무역행위라며 상계관세를 때린 것이다. 이 제도는 현대그룹 사태로 마비상태에 빠졌던 회사채 시장을 살리기 위한 비상 조치였다. 현대전자를 비롯한 현대 계열 4곳과 쌍용양회, 성신양회 등 모두 6개 회사가 혜택을 받았다.

△미국의 무역보복 배경엔 2000년대 들어 격화한 세계 반도체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무한경쟁으로 상대방이 쓰러지지 않으면 자신이 도태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치킨게임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이닉스 때리기는 미 의회에서부터 시작됐다. 미 의회는 한국의 금융시장 안정조치를 불공정 무역행위로 간주하고 강력한 무역보복 조치를 결의했다. 이 결의안을 주도한 인물인 로렌스 크레이그 의원(공화당)의 지역구는 아이다호주. 사사건건 한국 반도체메이커의 트집을 잡았던 마이크론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상 불공정 무역행위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WTO가 규정하는 금지 보조금은 3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특정기업의 수혜성과 정부의 재정지원, 산업피해의 명확성이 그것이다. 한국의 경우 회사채를 무차별 인수했으니 WTO규정 위반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지원 주체가 정부인지도 다툼의 여지가 있다. 당시에도 미국의 제재는 마이크론 로비에 놀아난 경쟁자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었다.



△금융당국이 미국발 출구전략 충격과 관련, 시장 정상화 방안의 일환으로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검토 중이다. 효과 측면에서 검증된 정책 수단이긴 한데 하이닉스 악몽은 부담스런 대목.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시장 구제책을 본다면 해외 변수는 너무 신경 쓸 것도 아니다. 미 연준(Fed)이 기업어음(CP)을 인수한 것이나 예금보험공사가 회사채 지급보증을 선 것은 차치하더라도 미 재무부가 국민세금으로 GM과 크라이슬러를 살린 것은 작심만 한다면 WTO 규정 위반으로 걸 만하다. 미국은 괜찮고 한국엔 안 된다면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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