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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2월14일] 드골리에 권홍우 편집위원 1910년 멕시코 포르트레노에서 거대한 유전이 터졌다. 하루 생산량 11만배럴. 세계 최대 규모였다. 멕시코는 단박에 세계 2위의 산유국으로 떠올랐다. 발견 주역은 스물세살짜리 오클라호마대학 휴학생 드골리에(Everette DeGolyer). 멕시코 대박은 그에게 단지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석유탐사의 역사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를 석유로 끌어들인 것은 라틴어. 문필가를 꿈꿨으나 라틴어가 싫어 지질학과를 택한 게 자신은 물론 세계의 석유지도를 바꿨다. 멕시코 시추 성공 직후 학업을 마친 드골리에는 석유탐사의 과학화에 힘을 쏟았다. 지표면에 자연 분출되는 원유의 흔적과 지형ㆍ영감에 의존하던 시추지 선정에 다이너마이트와 진동계를 도입하고 탐사 전문회사를 차려 업자들의 자본 모집과 시추를 거들었다. 드골리에는 다방면에서 이름을 떨쳤다. 석유에서 번 돈으로 문학잡지를 운영하고 칠레에 정통한 역사학자였다. 오클라호마대학 도서관의 명성도 그가 기증한 방대한 소장도서 덕이다. 반도체회사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전신인 CSI(Geophysical Service Inc)도 세웠다. 1956년 12월14일, 70세로 숨진 드골리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은 중동. ‘미주대륙만은 못해도 중동은 원유가 제법 묻힌 곳’이라는 인식이 지배하던 시절, 그는 전시석유행정부 자문관으로 일하며 ‘중동 석유는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횡재’라고 평가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사우디 국왕을 찾아가면서까지 석유이권 확보에 전력한 배경에도 드골리에의 권고가 깔려 있다. 드골리에 보고서는 중동의 지배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첫 단계였던 셈이다. 드골리에가 그린 석유판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입력시간 : 2006/12/1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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