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서양의 과학 지식을 한문으로 풀어 쓴 '공제격치(空際格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탈리아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1566~1640) 신부가 1633년 쓴 책으로 조선에도 전해져 실학자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공제'는 오늘날의 우주를 포함한 공중 혹은 대기를 말하며, '격치'란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온 말로 사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앎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책 제목처럼 저자는 행성과 별의 운동, 지구에서 일어나는 각종 자연현상을 불ㆍ공기ㆍ물ㆍ흙 등 4원소와 신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 배경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의 자연철학과 형이상학,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중세 교회의 신학이다. 모든 현상을 최대한 4원소로 설명하고 그 부족한 점을 신학적 관점에서 보충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책은 정조 5년(1781)에 간행된 '규장총목'의 서학서 목록에도 올라 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안정적 사회 기반이 흔들린 상황이라 이 책이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익ㆍ홍대용ㆍ박제가ㆍ박지원ㆍ정약용ㆍ정약전ㆍ최한기 등이다. 특히 최한기는 '지구전요'란 자신의 저술에서 태양중심설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또, 지구구형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실제로 항해자들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함으로써 설득력을 가졌다. 특히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번역을 맡은 이종란 박사는 "책이 1633년 발간된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조선에는 17세기 중반이나 그전에 이미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조선 학자, 특히 실학자들에게 이 책이 많이 읽혔음은 물론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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