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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남서부에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소도시인 오로라가 있다. 이 곳에는 젓갈과 전기장판도 파는 대형 한인마트인 H-mart를 비롯 자장면집, 미용실 등 작은 코리아타운이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총기 난사로 60여명이 죽거나 다친 '센추리 16'극장과는 차로 불과 10분, 9㎞ 거리다.
스페인어로 '붉은빛'이란 뜻의 콜로라도는 로키 산맥이 한일자로 길게 솟아 있는 고원지대다. 높은 산들이 즐비한 이 곳은 아스펜ㆍ베일ㆍ윈터파크 등 세계적인 스키장과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자연을 해칠 수 있다며 주민들이 동계 올림픽 유치를 반대한 청정 지역이다.
그런 콜로라도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1999년 덴버 동남부 리틀톤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13명이 사망한 이래 두 번째 대규모 총기 참극이다. 갑자기 닥친 재난 상황에 콜로라도 한국 교민은 물론 미국민 모두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미국의 치부이자 사회병리 현상의 극단을 보여주는 총기난사 사건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악명 높은 총기난사범 중에는 한국계 미국인인 조승희도 있다. 조씨는 2007년 4월16일 버지니아공대에서 같은 학교 학생 32명을 즉결 처분하듯 총살한 뒤 자살했다.
갑자기 닥친 재난에 인간은 마비 경험
당시 중급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3학년생인 클레이 비올랜드는 그 강의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전직 타임지 여기자인 아만다 리플리는 저서 '디 언씽커블(The Unthinkable)'에서 비올랜드가 동료 학생들이 총을 맞는 동안 죽은 척하다가 사지가 마비되는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천운으로 비올랜드는 살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마비에 빠져 도망가려 하지 못한 채 차례차례 죽음을 맞았다.
마비현상과 관련, 심리학자인 대니얼 존슨은 1977년 3월27일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공항에서 일어난 팬 아메리카항공 747기와 네덜란드 KLM 제트기의 충돌 사고에 주목했다. 충돌 직후 65세의 폴 헤크는 사고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 플로이에게 "따라와"라고 소리쳐 마비를 깨웠다.
747기 승객 396명 중 326명이 죽었다. 이중 상당수는 충돌 뒤 60초 후에 발생한 화재로 희생됐다. 마비에 걸려 탈출을 못한 것이다. 헤크 부부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 폴이 미리 대피통로를 숙지하고 마비를 깨웠기 때문이다.
재난은 불의에 닥친다. 인간은 무방비로 재해에 목숨을 잃어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비를 잘해두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전형이 바로 9ㆍ11 테러 당시 모건스탠리의 보안 책임자였던 릭 레스콜라다.
레스콜라는 9ㆍ11 테러 당시 모건 스탠리 임직원 2,687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더 구하려 층계를 오르다 타워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베트남 전쟁영웅이던 그는 8년 동안 모건 스탠리 임직원들에게 엄격하게 계단 대피훈련을 시켜왔다.
재난과 재해는 자연 현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민이 겪었던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사태, 2008년 금융위기는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지금은 유럽 재정위기로 촉발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세계 대공황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훈련으로 생존 높이듯 경제재난 대비를
경제지표들은 심상치 않은 경고음을 연일 울리고 있다. 전대미문의 경제 재난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빈곤화 심화, 부동산값 폭락, 내수침체에 따른 자영업 몰락으로 서민과 취약계층의 숨통이 점점 막히는 형국이다.
한국이 경제 재난을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지 매우 걱정스럽다. 정치권과 정부 내에서 릭 레스콜라는 보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식의 경제민주화 타령만 연일 울려대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 쓰나미에 무방비로 당할 취약계층을 겨냥한 치밀한 사회안전망 대책이 절실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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