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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넘어야 할 벽이 높네요. 답답합니다."(고용노동부 고위관계자)
최근 열린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의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는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입법과 관련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 장관은 "장시간 근로 문제와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면서도 "더 효율적으로 근로시간 단축을 정착시키기 위해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심도 있는 논의를 가속화하겠다"고 말했다.
근로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고용부의 정책 추진 의지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노사정 간의 논의가 이른 시일 내에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정부 임기 내 입법이 어려울 가능성도 있음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고용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116시간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여타 선진국과 비교할 때 한참을 웃도는 수준이다. 지난 2010년 말 기준으로 미국과 일본의 연간 근로시간은 각각 1,749시간, 1,733시간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1,647시간, 1,419시간에 불과했다. 국내 근로자들이 선진국보다 적게는 400시간에서 많게는 700시간가량을 더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 근로자들이 내던져져 있음에도 근로시간 단축 논의가 난항을 거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무부처 수장인 이 장관이 근로 시간 단축을 역점 과제로 삼고 강력한 추진 의사를 수 차례 밝혔지만 지식경제부와 기획재정부는 큰 틀 안에서의 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성급한 추진보다는 긴 시간을 두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계 역시 수십년간 이어져온 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뀔 경우 그 충격파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나타내왔다. 결국 다른 부처에 밀리고 재계의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고용부의 추진 동력이 힘을 잃은 채 사면초가에 내몰린 상황인 셈이다.
◇뿌리 깊은 장시근 근로의 원인은…=고용부 관계자가 3월 펴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장시근 근로가 뿌리 깊이 고착된 데는 크게 제도적 원인과 관행적 원인이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 현행 근로기준법은 연장근로와 휴일근로를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에 연장근로를 주 12시간까지 추가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휴일 근무는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아 실제 근로시간이 5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업종이 많은 상황이다.
지난해 6월 고용부 조사에 따르면 연장근로 시간이 12시간 이상이면서 휴일 근무를 하는 근로자의 비율은 12.6%에 달하며 제조업과 자동차 제조업의 경우 각각 30.1%, 54.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주 간담회에서 이 장관은 "휴일근로와 연장근로를 분리하는 개념은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며 "반드시 개선돼야 할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사 합의로 연장 근로에 제한을 두지 않는 근로시간 특례업종을 따로 지정해놓고 있다. 운수업ㆍ금융보험업ㆍ광고업 등 12개 업종으로 노사정위원회가 근로시간 특례업종을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공익위원 합의안을 1월 도출했지만 이 역시 어느 시기에 입법이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이 같은 제도적 측면의 한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로문화 또한 장시간 근로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상사 눈치 보기 등으로 인한 불필요한 초과 근로가 많고 직장 내 분위기 때문에 적극적인 휴가 사용이 힘든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정부 조사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들의 연차 휴가 사용률은 61.4%에 그치고 있다.
◇정책 추진 과정은…=2004년 이후부터 기업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도입되던 주 40시간제는 이 장관의 취임 한 달 뒤인 지난해 7월부터는 5인 이상 2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됐다.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삶의 질 향상, 일자리 창출, 소비 촉진 등의 이유로 근로시간 단축 검토를 지시하면서 이 장관도 본격적인 추진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월24일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하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할 방침임을 밝힌 후 교대제 개편을 통한 장시간 근로 개선에 성공한 기업들을 방문해 격려를 아끼지 않는가 하면 3월 말 미국의 완성차 업체를 둘러보고 온 직후에는 한국 자동체 업체들의 낮은 생산성에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뚝심 있는 행보라는 응원과 성급한 여론몰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공존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의 지시 이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이번 정부 내 입법이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결국 각계의 비판이 일부의 소극적 응원을 압도했다는 방증이다.
◇경영계는 반대…노동계도 시각 엇갈려=고용부 공무원의 한탄처럼 정부가 넘어야 할 벽이 지나치게 높고 견고해진 데는 경영계가 큰 역할을 했다. '근로시간 단축→신규 채용→인건비 부담 가중'이 기업을 비롯한 경영계 비판의 명분이다.
2월 이 장관과의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경제단체장들은 "급격한 정책 전환에 따른 기업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는 우회적 불만과 함께 "이해당사자들 간의 접점을 찾는 것이 우선이며 성급하게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기업의 인사노무 부서장 302명을 대상으로 '19대 국회 노동입법 방향에 대한 기업의견'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려 53.6%의 기업들이 근로시간 단축을 경영에 가장 부담스러운 요인으로 지목했다.
하상우 한국경영자총협회 경제조사팀장은 "신규 채용 외에 근로자들의 임금 보전 요구에 따른 시간당 임금 상승뿐 아니라 근무제도 변경과 이에 따른 인사관리 시스템 변화 등은 기업들에 인건비 부담 못지않은 큰 문제를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자리 창출 효과에 대해서도 하 팀장은 "시간당 고용비용 증가는 노동 수요의 감소를 초래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며 "근로시간 단축 이후 노사합의로 소득감소 대신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킬 경우 일자리 창출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정부의 정책 추진이 '산 넘어 산'일 수밖에 없는 더 큰 이유는 노동계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린다는 점이다.
현장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정책적으로 현실화될 경우 휴일 수당을 챙기기 힘들뿐더러 임금 보전 요구에 따른 노사갈등의 불씨가 하나 더 얹어진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이를 의식한 듯 이 장관 역시 간담회에서 "모두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이라며 "삶의 질 향상에 따른 다소간의 임금 하락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인 노총의 생각은 다르다. 연내 입법이 힘들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 정승희 한국노총 기획조정국장은 "틈날 때마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의지를 강조해온 고용부에는 다른 부처와 경영계 등의 반대를 빠르게 설득해 정책 입법이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라며 "결국 다음 정권으로 넘어간다면 무책임·무소신·무능력의 소치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이번 정부 임기 내의 입법은 분명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근로 시간 단축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부처도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논의를 이어가자는 상황"이라는 이 장관의 말을 믿는다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만 하는 대한민국'에서 벗어날 그날에 대한 희망을 미리 버릴 필요는 없다. 이 장관과의 간담회 직후 고용부 고위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올해 입법이 안 되더라도 대선 이후 어느 정권이 출범을 하더라도 근로 시간 단축은 이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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