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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마당놀이와 함께한 30년… 관객·배우 어우러지는 '판' 깔았다는데 자부심"



클래식 즐겨듣던 음악감상실서 국악 접하며 '한국형 뮤지컬' 영감
'마당놀이' 만들어 성공 거뒀지만 열악한 환경에 명맥 끊길 위기
'심청이 온다'로 바통터치 기대
관객과 소통 상실한 연극판, 상업주의로만 쏠려 아쉽기도


연극에 빠져 있던 20대 청년에게 평생의 '화두'를 던져준 장소는 뜻밖에도 음악 감상실이었다. 클래식을 즐겨 듣던 그에게 서울 삼각지의 '아폴로'와 종로 1가에 위치한 '르네상스'는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브람스와 쇼팽의 선율에 녹아들던 어느 날, 생소하기만 한 국악이 말을 걸어왔다. "당시 르네상스에서는 가끔 국악을 틀어줬어요. 관심이 없다 보니 국악이 나오면 감상실 안 사람들이 일제히 담배를 태워댔죠. 그런데 하루는 피하지 말고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낯선 음악을 따라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들을수록 청년의 머릿속에는 독특한 그림이 그려졌다. "서양에 베토벤·브람스·쇼팽의 음악이 있다면 그 대칭점에 해당하는 우리 음악(국악)이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서양 연극에 아서 밀러가 있다면 역시나 그에 걸맞은 우리(한국)의 연극과 연극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번연극 위주의, 서양인을 흉내 낸 분장이 지배적이던 당시 연극에 불편함을 느꼈던 그에게 생소한 국악 선율은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줬다. '우리의 이야기로 오늘을 이야기하자' 손진책(사진) 극단 미추 대표의 연출 철학과 그가 만든 '마당놀이'라는 공연 장르의 뿌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4년 만의 마당놀이, 그리고 고민=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난 손 연출은 오는 10일 개막하는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 막바지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짬을 내 진행한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연습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심청이 온다'는 2010년 마당놀이 30주년 기념 공연 '마당놀이전' 이후 4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다. 마당놀이의 창시자로서 오랜만의 공연 제안을 흔쾌히 수락할 법도 했지만 손 연출은 오히려 1년 가까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올 초 안호상 국립극장장이 마당놀이 공연을 제안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당놀이가 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에 과거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단순히 한 번 더 공연 올리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였어요."

◇절반만 완성된 손진책의 그림=손 연출이 처음 마당놀이를 시작할 때 그린 그림이 있다. '내 손에서 30년을 끌어가고 다음 30년은 후배들이 이어간다' 절반은 성공이었다. 한때 공연이 매진 행렬을 이루고 방송국에서는 명절 황금 시간대에 마당놀이 녹화방송을 방영할 정도로 '마당놀이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절반의 성공에 취하고 싶지 않았고 과감히 작별을 고했다. "등 떠밀려 떠나기보다는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어요. 마당놀이를 안 한다는 게 아니고 우리 세대가 장기집권을 끝내고 후배들이 대를 이어주기를 바란 거죠" 그의 바람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2010년 말 손 연출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며 극단 미추 대표직을 내려놓은 후 마당놀이는 자취를 감췄다. 화려한 '30주년 기념 공연'이 애석하게도 마지막이 된 것. 후배들이 '국민 공연'을 이어받기에는 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무대 4면을 객석으로 꾸미는 마당놀이 특유의 형식 탓에 공연 전에는 늘 특수 공연장을 설치해야 했고 당연히 제작비도 많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기존 배우들을 대체할 신진 예술가의 발굴도 부족했다.

"마당놀이는 무대 4면을 배우가 다 담당해야 합니다. 일반 공연처럼 한 면만 담당하던 배우에게는 낯선 환경이고요. 여기에 노래와 연기·춤까지 소화해야 하니 배우에게는 도전이 쉽지 않은 부담 큰 장르인 거죠."

◇'심청이 온다'로 마당놀이 바통 터치에 나서다=대를 이을 후배들을 발굴하고 대중에게 마당놀이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알리는 것이 절실한 시점. 손 연출은 고민 끝에 원년 멤버와 신진배우·스태프로 팀을 정비해 공연을 올리기로 했다. 이번 공연은 마당놀이 탄생과 성장의 주역인 손진책(연출)·국수호(안무)·박범훈(작곡)·배삼식(각색)·김성녀(연희감독) 등과 국립극장 소속 예술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함께 해 신구의 조화를 이뤄낼 예정이다. 손 연출은 "전통을 현대에 발을 딛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국립극장이란 단체와 마당놀이의 정체성은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며 "서로가 하나로 어우러지면 좋은 공연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손 연출이 마당놀이의 창시자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데 있지 않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턱 낮은 '한 판의 놀이'를 제공했다는 것. 그게 바로 손 연출이 뿌듯한 지점이다. 그는 "마당놀이 관객은 연극이나 뮤지컬·무용 등 기존 공연 장르에 익숙한 관객과 달리 마당놀이로 처음 극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며 "어떤 이들은 마당놀이가 고답적 예술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이들이 공연장을 처음 찾아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판을 깔았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상상 못한 마당놀이 르네상스=마당놀이의 성공은 만든 사람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981년 모 방송국의 창사 기념 무료 행사로 기획한 게 마당놀이의 시작이었다. "열린 연극, 한국형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관객이 보기만 하는 게 아닌 참여하는 공연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반응은 대단했다. 입소문을 타고 무료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에 관객이 몰리면서 전경이 동원될 지경에 이르렀다. 언로가 막혀 있던 시절,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마당놀이 특유의 풍자와 해학에 노년층은 물론 젊은 관객들도 빠져들었다. 공연 녹화 영상은 명절 황금 시간대에 방영됐고 재공연 때도 관객들이 구름같이 밀려왔다. "한 번은 전주에 순회공연을 갔는데 공연시간이 돼도 점심 먹으러 나갔던 배우들이 들어오지를 않더군요. 어떻게 된 건가 알아보니 관객들이 공연장 앞에 너무 몰려 배우들이 입장을 못 했던 거였어요(웃음). 결국 공연도 지연이 됐답니다."

◇마당은 두 발 딛고 일상을 사는 지금 여기='마당놀이'라는 명칭에도 뒷이야기가 있다. 마당놀이를 만들 때 이미 '마당극'이란 장르가 있었지만, 이 표현이 손 연출에게는 딱히 와 닿지 않았다. 한국의 '마당'에 서양의 개념인 '극'이 더해져 마치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은 '모둠놀이'였다. 춤과 시, 문학과 음악이 함께하는 놀이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마당'이라는 단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마당은 단순히 흙바닥에 멍석 펴고 만드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곳, 사람을 만나고 일상을 소화하는 '지금 여기'인 거죠. 사람들은 '마당놀이'라고 하면 그저 한복 입고 북 치고 장구 치는 골동품처럼 인식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고전을 통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오늘과 인간다운 삶을 생각해보자는 게 핵심이에요" '모둠놀이'가 될 뻔했던 '마당놀이'의 탄생 비화다.

◇소통 상실한 연극판 아쉽기도=조연출 생활을 포함해 50년 가까이 연극쟁이로 살아온 그다. 돈이 되든 안 되든 관객과의 소통을 강조해온 그에게 상업 일변도로 흘러가는 연극 시장은 아쉽기만 하다. "관객에게 무조건 서비스하려는, 돈 낸 만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문제죠. 관객에게서 오는 피드백을 오로지 돈으로 생각하면서 관객과의 소통 정신이 많이 약해진 게 사실이에요. 현장극은 관객의 에너지와 배우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게 묘미인데 요즘에는 관객 에너지보다는 배우의 일방적인 보여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상업적인 작품으로 관객이 쏠리는 현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상업극도 있어야 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지닌 작품도 있어야 해요. 다만 상업 연극의 경우 투자를 통해 이익을 낸다는 인식에 치우쳐 설익은 작품을 찍어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연극인을 만든 힘은 예술적 동지 '가족'='계산 안 하고 빠져 살다 보니 이만큼 왔다'는 연극인 손진책. 그가 평생 한우물을 팔 수 있었던 데는 예술적 동지이자 아내인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 김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남편은 돈을 모르는 순수한 예술가"라며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편이 순수하게 연극만 할 수 있도록 드라마·연극·영화를 가리지 않고 출연하며 돈을 벌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 내조가 일방적이었던 건 아니다. 손 연출도 '김성녀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 국가적 손실'이라며 8남매의 맏며느리인 김 감독을 제사에서 제외해줄 정도로 적극적인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배우인 딸에 이어 아들까지 연극 연출로 데뷔하면서 가족 모두가 서로의 예술적 동지가 됐다. 손 연출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연극 작품에 대한 평이 가혹해 '너는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자'고 생각했었다"며 "'이 아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작품을 본 뒤 '연출 감각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합격점을 줬다"고 귀띔했다.

손 연출에게 연극은 결국 인간학이다. 삶과 인간을 보는 따뜻한 눈이 절실한 것이야말로 연극이요, 연출이다. '지금 여기에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생각한다.' 그가 자기 작품의 뿌리라 말하는 마당 정신도,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애 모든 사람이 한데 어우러지는 마당놀이도 결국 인간을 향한 이 연극쟁이의 따뜻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He is…

△1947년 경상북도 영주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 △1982∼1986년 극단민예 대표 △1986년 극단 '미추' 창단 △1988년 제24회 한국백상예술대상 연출상(지킴이) △1989년 제25회 한국백상예술대상 연출상(오장군의 발톱) △1994년 제30회 한국백상예술대상 연출상(남사당의 하늘) △1994년 국제극예술협회 부회장 △1998∼2000년 서울연극제 예술감독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총 연출 △2003년 제13회 이해랑연극상 △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총연출 △1986∼2010년 극단미추 대표 △2010년 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2010~2013년 국립극단 예술감독 △(現) 극단 '미추' 대표



'바람둥이 심봉사' 로 캐릭터 변신·무대 둘러싼 객석설치 등 색다른 재미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는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신명 나는 새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난다. 4년 만의 마당놀이 귀환작 '심청이 온다'를 통해서다. '심청이 온다'에서는 심봉사와 뺑덕의 이야기가 부각된다. 스토리의 변화 속에 익숙한 캐릭터들도 새롭게 변신한다. 처량한 홀아비 심봉사는 능글맞고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로, 악녀 뺑덕은 심봉사의 과대포장에 낚여 속아 넘어간 피해자로 등장한다. 관객들은 "세상에 두 번 다시 못할 것이 후처 노릇"이라며 한을 토로하는 색다른 뺑덕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주인공 효녀 심청 역시 당돌한 15세 소녀로 재탄생한다.

마당놀이의 '세대교체'라는 의미를 지닌 이번 공연은 장소 면에서도 도전 그 자체다. 그동안은 야외 공터나 실내 체육관에 별도의 천막 극장을 만들어 공연을 펼쳐왔지만, 이번에 택한 공연장은 서양식 대형 실내 극장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다. 관객이 한쪽 면에서만 무대를 볼 수 있는 프로시니엄 형태의 해오름극장 무대 위에는 3면으로 객석이 추가 설치돼 사방에서 관객들이 무대를 둘러싸는 형태가 된다. 객석을 감싸는 11m 높이의 천은 대형 스크린으로 활용, 수시로 관객들의 모습을 투사해 색다른 재미를 안겨줄 예정이다. 새로운 마당놀이의 주역으로 캐스팅된 배우들도 주목할 만하다. 심봉사 역은 국립창극단의 대표 희극 전문 배우 김학용과 전북도립국악단 창극단 단장인 송재영 명창이 맡았고 뺑덕 역은 국립창극단의 재주 많은 소리꾼 서정금과 관록의 김성예 명창이 맡았다. 이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심청 역에는 국립창극단의 젊은 주역 민은경과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젊은 소리꾼 황애리가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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