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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명한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은 국문학에서 ‘충신연군지사’라는 장르를 발전시킨 인물로 알려집니다. 사실 그의 삶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군제를 개혁하고 재정 관련 대책을 내놓는 등의 현명한 관료로서의 이미지도 있지만, 서인의 일원으로서 상대 당을 과감하게 배제하고 숙청시키는 패권주의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드는 성격이다 보니 좌천당하거나 실각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유배지에서나 지방으로 내려가 생활하는 동안 자연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임금에 대한 사랑으로 비유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동별곡’ 같이 유명한 작품은 정철의 문학적 역량 못지 않게 순수한 인문 콘텐츠도 전략적으로 정치에 활용할 줄 아는 재치를 반영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시가를 하나의 미디어로 활용할 수 있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명종, 선조, 광해군 등은 그의 권모술수적인 면모를 매우 얄미워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임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지혜를 보고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도 내공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주군’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통보 방식이 매우 과감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동양 문화에서 사직(辭職)은 치사(致辭)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철학과 가치에 반대하여 물러나는 것은 오늘날 여러 관료들의 자진 사임과 유사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과 예의를 갖춘 마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민정수석이나 문화부 장관의 경우를 보면, 사실상 아름다운 마무리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도자가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분노를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송강 정철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이 정무적 감각을 가져야만 하는 ‘정치인’임을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고, 정당 정치의 파란 속에서 편파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가는 시작할 때건 마무리할 때건 철저히 정치적인 논리와 타당성을 띈 선택을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현대의 정당 간 경쟁이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보다 더 후진적인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정치의 부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와대가 설명했듯 민정수석은 정무직 공무원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움직임이 대통령의 입지와 직접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설사 지도자와 의견 차이가 있거나, 비서실장의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처음 의사결정자에게 피력했던 ‘연군(戀君)의 감정을 어느 정도는 기억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맞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어떤 실세 정치인처럼 자신의 주군을 대신해 감옥에 가거나 법정 증언을 전략적으로 하는 모습도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서 내리는 선택과 ‘등돌림’은 엄연히 다릅니다. 돌연 사임 이후에 지도자가 받았을 정치적 타격을 감안하면,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선택을 온전히 이해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지난 며칠 간 언론은 ‘영이 안 서는 청와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도력 부재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고 의사결정자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identity)입니다. 자신이 감정을 소비하면서 분풀이로 사임을 해도 되는 자연인인지, 아니면 조직 전체의 명운을 책임지고 있는 제도적 존재인지에 대한 엄연한 가치 판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들어 우리나라 조직의 의사결정자들이 보이는 모습은 ‘멘탈 붕괴’ 끝에 감행된 배신 아닌 배신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미디어는 철저히 더 많이 주목받는 사람의 편이기에 그들이 사임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표를 던지고 나가는 사람이나, 그것을 마지못해 수리하거나 해임 형태의 양식을 빌어 상대방을 과감하게 내쳐야 하는 의사결정자나 모두 ‘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공직자들도 감성적으로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충동적인 행동이 우려될 때마다 처음 지도자에게 피력했던 ‘사랑’의 가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의사결정자와 자신을 각각 다른 프레임으로 비출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배를 탔던’ 사람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가져야만 아름다운 마무리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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